마종기 시 <혼잣말하기> 부분
주위가 더 어두워지면
혼잣말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물상이 하나씩 보이지 않을수록
말을 걸 대상은 풍성하게 늘어나고
세상은 돌아서서 은밀하고 다정해진다.
마종기 시 <혼잣말하기> 부분
어머니는 늘 혼잣말하셨다. 아침에 일어나서 베란다에 피어난 꽃들을 보면서 “참 예쁘기도 하다.” 더러 비실거리는 식물을 보면서 “너도 어서 힘을 내서 피어나야지” 꼭 아이에게 하는 말처럼 스스럼이 없으셨다. 식물이 있는 베란다가 하필 내가 잠드는 창밖이어서 잠결에도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또 저러시네‘라고 했었다.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간다. 베란다에 키우는 식물의 무용함을 설파하며 어떻게든 식물을 퇴치하려고 수를 쓰던 내가, 이제 그 장소에 식물을 키운다. 아침이 되면 물을 준다. 보지 못한 사이 피어난 꽃을 보며 혼잣말한다. “언제 피었어? 못 알아봐 줘서 미안하다.” 죽어가는 식물에도 말한다. “영양제 줄 테니 먹고 소화를 잘 시켜봐. 너도 살 수 있어” 젊은 내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한 소리 했을 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인제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직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집에 돌아오면, 몸보다 더 입이 피곤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종일 엄마의 말이 고팠던 아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질문해 댔고 몇 마디 대답하다가 이내 지쳤다. 빨리 커서 더 이상 내게 질문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소망했다.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졸기도 했다. 그런 때가 있었다. 아이들은 컸고, 곁을 떠났다. 덕분에 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건 오래전 소망이었을 뿐이다.
어머니의 아이들도 그런 때가 있었을 거다. 종일 엄마를 기다리다 저녁 내내 종알거리며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던 때. 이제 그 아이들은 그때의 엄마보다 더 늙은 아이가 되었고 엄마의 곁을 찾지 않는다. 어머니는 식물과 대화하는 대신 혼잣말을 하신다. 의사는 섬망이라고 했다. 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끊임없이 말씀 하신다. 어쩌면 거기 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늘 아이들로 환하던 어머니의 주위는 어두워졌다. 멀리 바라보던 눈은 가까운 물상의 이름도 모른다. 자녀들의 얼굴도 잊은 지 오래다.
어머니는 엄마의 목소리를 고파하던 아이가 되셨다. 계속 질문을 한다. “저이는 누구예요?” “내가 여기 어떻게 왔어요?” “밥은 언제 먹어요?” “나 어디서 자요?” 대답해 드려도 그때뿐. 질문은 무한 반복된다. 신기하게도 잊어버린 질문의 내용은 날마다 같다.
지금 어머니의 모습은 멀지 않은 나의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짜증이 나고, 버겁다. 이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고 하면 견디기 힘들다. 100세를 살 수 있는 것이 과연 축복이기만 할까, 생각하게 한다. 사람의 생명은 아직 신의 영역이다. 그러니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가 종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마지막 날까지 건강해야 한다. 비록 대화상대는 줄어들고 보아야 하는 물상은 희미해지겠지만 나의 바라는 소망은 끝 날까지 두 다리로 걷고, 나의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