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 <해당화> 부분
29. <남루했던 내 도시락>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배고픔보다 간절한 것이
기다림이라는 듯이
달그락달그락 하는 밥그릇을
더 아랫목 깊숙이 파묻었습니다
박형준 시 <해당화> 부분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밥그릇을 아랫목 이불속에 묻어두셨다. 내 어린 발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다가 무심결에 밥그릇을 엎는 일이 있고 나서는 나일론 보자기에 싸 놓으셨다. 공처럼 단단해진 밥그릇은 이불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지만, 끄떡없이 따뜻했다. 어린 누이가 편물공장에서 잦은 야근을 하던 때였다.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어머니는 늘 맨 먼저 푼 밥그릇을 부엌의 시렁에 얹어 놓으셨다. 객지에 나간 식구가 밥을 굶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가난한 시절 아이들이 굶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토속 신앙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공처럼 굴러다니던 아랫목의 밥그릇은, 시렁 위에 놓이던 밥주발은 언제 사라졌을까?
밥그릇에 대한 기억은 슬프면서도 그립다. 큰 언니와 오빠는 3년 차이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시골의 작은 학교였다. 소풍날 엄마가 언니의 점심을 밥그릇에 싸주었다. 언니는 점심밥을 들고 가다가 길에서 떨어뜨렸다. 밥그릇이 데구루루 구르더니 밥이 쏟아졌다. 언니는 창피해서 죽을 지경인데 곁을 지나던 오빠가 쌩~하니 가버리더라는 것이다. 그때 얼마나 섭섭했던지 60년도 넘은 이야기를 아직도 생생하게 말한다. 뒤처리는 오빠의 동급생 언니들이 도와줬다고 한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던 숙맥인 언니였다.
숙맥이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4학년, 전학을 왔다. 엄마도 언니도 집에 없는데 학교에서 도시락을 싸서 오라고 했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저녁 내내 고민하다가 오빠한테 말했다. “내일 학교에 도시락 싸서 오래” 다음 날 아침 오빠가 도시락이라고 내민 것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작은 양은 냄비였다. 뚜껑이 있는 그릇이 그것뿐이어서 거기에 밥을 쌌다고 했다. 나는 그건 못 들고 간다고 다른 곳에 싸달라고 떼를 썼다. 결국 오빠가 동그란 찬합을 찾아냈다. 양은 냄비의 밥을 옮겨 담아 보자기에 싸서 학교에 갔다. 점심시간 선생님이 도시락을 꺼내라고 하셨다. 친구들의 도시락은 모두 네모난 작은 도시락이었다. 나는 창피해하며 소심하게 책상 서랍 안에 있던 도시락을 꺼냈다. 그러다가 그만 도시락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바닥에 떨어진 도시락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거다. 모양이 다른 그것만으로도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는데 굴러가는 도시락을 보고 친구들이 깔깔 웃어댔다.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국가에서 보리쌀을 넣어서 밥을 하라고 혼식 장려 운동을 펼치던 때였다. 점심시간이면 선생님이 보리쌀을 얼마나 넣었는지 검사했다. 그런 운동이 아니어도 우리집 밥은 늘 꽁보리밥이었다. 어느 날 내 도시락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랐다. “밥이 왜 까매?” 그때도 창피해서 도시락 뚜껑으로 반쯤 덮어두고 밥을 먹었다.
어떤 친구는 하얀 밥에 맨 위에만 보리밥을 살짝 덮어서 가져오기도 했다. 도시락 반찬은 거의 김치가 전부였다. 가난한 친구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가을이면 메뚜기를 볶아서 도시락 반찬으로 가지고 오던 친구가 있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아이들이 그때가 되면 그 친구의 도시락 주위로 모여들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다름을 인정할 수 있던 시기였다. 3학년 때였던가 2교시가 끝날 무렵 담임선생님께서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선생님 책상 위에 내 도시락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제 도시락이 왜 여기 있어요?” 아침에 도시락 챙기는 걸 잊고 학교에 온 거다. 엄마가 가져다가 교무실에 놓고 가셨다. 나는 그 시간까지도 가방 속에 도시락이 잘 있다고 생각하고 3교시가 끝나면 밥을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도시락이 창피하지는 않았다.
취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초년 시절. 선배들은 점심시간이면 근처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처음에는 나도 어울려 다녔는데 한 달 밥값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핸드백에 들어갈 만한 작은 도시락에 반찬은 늘 계란말이였다. 숙녀의 핸드백에서 김치 냄새가 나게 할 수는 없었다. 직원들이 모두 점심을 먹으러 나가면 나는 자리에 앉아서 도시락을 꺼내고 잽싸게 먹어 치웠다. 내 가난을 누가 볼까 봐 창피했던 것 같다. 밥을 빨리 먹는 습관은 이때 생겼다. 나의 밥그릇에 대한 추억은 늘 남루하고 창피했던 기억이다. 그럼에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감사하다. 덕분에 이만큼 길쭉하게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