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현실>
<현실은 도전이다>
현실은 꿈이 사라지듯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 버리지는 않는다.
(...)
현실은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매 순간 가는 곳마다 우리와 동행하기에.
우리의 여행길에서
현실은 매 정거장마다 먼저 와서 우리를 맞이한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현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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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현실을 부정하면서도 현실에 산다. 그것이 삶이다. 간절히 바랐던 취업을 하고 나서는 아침마다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투덜거린다. 하루만, 한 시간만 더 잠들 수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도 몸을 일으켜 현실의 직장으로 간다.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기도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것들은 부정하면서도 실행하는 것이다. 아이러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현실은 꿈이 사라지듯 느닷없이 푸드덕 날아가 버리지는 않는다” 우리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부정하든 긍정하든 현실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뒤로 물러나는 법 없이 굳건하게 앞서간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과 맞닥뜨릴 때 ’현실이 아닐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13년 전 어느 겨울 아침에 겪었던 일처럼. 눈이 내렸고, 출근길이었고, 언덕도 내리막도 아니었다. 운전중이었고, 저속이었다. 다리 아래를 지나가는 이면도로였다. 늘 넘어가던 과속
방지턱에서 액셀러레이터에 살짝 힘을 주었다. 순간 자동차는 피융~하며 쏜살같이 앞으로 나갔고 다리 옹벽에 부딪혔다가 뒤로 밀려나 다시 앞으로 치달았다. 차는 천변 산책로를 가로질러 개울 속으로 처박혔다. 겨울이라 물은 없었고 커다란 바윗돌이 포진해 있는 개울이었다. 나는 45도쯤 기울어진 채로 차와 함께 처박혔다. ’이게 현실일 리 없다. 나 아직 잠을 자고 있나? 꿈인가? 꿈이면 빨리 깨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차 창을 두들겼다. “괜찮으세요?” “119에 신고해 드릴까요?” 나는 그러라고 했다. 몸을 다친 곳은 없었는데 처박혀진 각도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차의 상태도 알 수 없어 섣부르게 움직이다가 더 큰 사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구급대원들이 당도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차에서 내렸다. 차는 닭들이 모래 속에 머리를 처박은 것처럼 뒤꽁무니를 하늘로 뻗은 채 박혀 있었다. ’이게 현실일 리 없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다.‘ 귀퉁이에 앉아서 사고처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나는 계속 되뇌었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차는 폐차 되었고, 나는 트라우마로 한동안 차를 운전하지 못 했다. 아직도 눈이 내리는 날엔 절대로 운전을 하지 않는다.
그 일 말고도 지나간 삶에서 내게는 몇 번이나 더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일들이 일어났다. 갑자기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이가 무거운 질병으로 진단받았을 때, 어이없는 송사에 휘말렸을 때 등. 먼저 가슴이 철렁하고, 다음은 혹시 꿈은 아닌지, 꿈이라면 힘들어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간절해도 현실은 내게서 비껴가지 않는다. 그저 감당하라고 한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현실과 맞닥뜨릴 마음이 들 때에야 비로소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단 한 순간도 현실은 거저 지나는 일이 없었다.
현실은 떼 버릴 수 없는 우리의 동행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 부정해 봐야 손해다. 일찍 깨닫고 함께 하는 것이 이롭다. 알고 있어도 마음에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을 아무리 오래 살아도 잘 안된다. 그래서 수양도 하고, 수련도 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이유이고 글을 쓰는 목적일 수도 있겠다. 나름대로 현실과 잘 동행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 애쓰며 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살아진다. 어느날은 현실이 있어 즐겁고, 현실이 있어 행복한 날에 이른다. 현실이 있어 꿈을 꾸게 되고, 현실이 있어 미래를 바라보게 되고, 현실이 있어 어제를 들여다보게 된다. 어차피 동행해야 한다면 친하게 지내자. 현실은 결국 나 자신이다. 잘 다독여 들여다봐 주고, 용기를 주고, 도전하며 나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