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 <다시 공터>
<다시 공터>
네가 두고 간 말을 아직 가지고 있어 어디에 쓰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었을까 그러니 마냥 넣어두고 다녔지 작은 열쇠처럼 가끔 잘 있나 꺼내보았다가도 이내 다시 깊숙이 넣어두고 혼자 있게 했지
박준 시 <다시 공터> 전문 박준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던 기억은 없다. 아마도 어린시절 내내 문을 잠글 필요가 없는 집에 살았거나 언제나 집에서 나를 맞아주는 엄마가 있었거나 했던 것 같다. 어른이 되어서 사무실에 열쇠를 두고 퇴근했던 어느날이 있었다. 초보 운전자였고 아이 둘과 함께 출퇴근 하던 시절이었다. 초조하고 긴장하며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을 여는 열쇠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무실이 있는 도시로 달려가는 대신 열쇠 수리공을 부르는 것을 택했다.
열쇠는 용도가 분명하다. 문을 여는 것이다. 문을 열지 않을때도 잘 있는지 가끔 한 번씩 손끝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된다. 무게감이나 부피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눈에 뜨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없어지면 낭패다. 집에 들어갈 수 없다. 문을 열 수 없다. 엄마들은 한 때 아이들에게 열쇠 목걸이를 걸어주면서 ’절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하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열쇠는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뭉쳐둔 열쇠 꾸러미 속에서 정작 딱 맞는 열쇠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한다. 자물통과 열쇠는 짝이 있다.
말도 열쇠처럼 알맞은 용도가 있다. 사용하기 적당한 곳을 찾아서 써야한다. 네가 두고 간 말도 자물통 같은 짝이 있을까? 언젠가 굳게 닫힌 문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굳게 닫힌 것은 너일까? 너의 마음일까? 너의 세상일까? 그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어 나는 너의 말의 쓸모가 어디 인지도 모르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숨겨두고 있는 것인가. 가끔 말이 거기 잘 있는지를 꺼내어 확인하는 것으로 너를 기다리는 것인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인가.
열쇠가 문을 열 듯, 말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다. 열쇠로 문을 잠그듯 말도 마음의 문을 잠근다. 이렇게 열쇠와 말이 닮았다. 쉽게 드러내어 남에게 보이기 보다 적당히 숨겨두고 꼭 필요할 때 꺼내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입에 자물쇠를 잠그는 것으로 말을 한 번 더 숨겨보는 거다. 적절히 쓰임새가 나타날 때 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