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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작은 것들을 위한 연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by 따시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 부분



모든 글은 읽는 시간과 장소와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와 닿는다. 늙어서 읽는 고전이 어릴 때 읽었던 고전과 전혀 다른 깨달음을 주는 것처럼. 자신의 인생 책을 여러 번 읽는 이유일 것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선집 『끝과 시작』은 어렵다. 함축된 언어로 쓰인 詩라는 문학이 주는 어려움과 문화가 다른 종족이 쓴 언어의 행간을 따라 의미를 유추해 내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녀의 시는 길다. 작가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산문을 읽는 것 같다.

<작은 풍선이 있는 정물>을 처음 읽었을 때 시의 첫 연과 일곱째 연에 밑줄을 그어 두었다. 스치듯 읽었어도 뭔가 살짝 나의 가슴에 닿았다는 의미다. 몇 밤을 보내고, 푸른 새벽 시간 다시 읽는다.

죽음의 순간에 이르면

추억을 되돌리기보다는

잃어버린 물건들을 되찾고 싶다. (1연)

시인이 되찾고 싶은 물건들은 우산, 여행 가방, 장갑, 외투, 옷핀, 머리빗, 종이 장미와 노끈, 주머니칼, 녹슨 열쇠, 각종 증명서, 자격증, 시계 등이다. 한 생에 모가지를 뻣뻣하게 치켜들고 살게 해준 지위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를 큰 목소리로 불러 세울 수 있었던 빵빵한 재력 아니다. 한 번쯤 잃어버렸고, 잃어버려도 애써 찾지 않는 물건들이다.

“아니, 도대체 이게 다 뭐죠?”

“뭐, 아쉬운 게 하나도 없네요.”

어쩌면 너무 하찮아서 눈에 뜨이지도 않았던 작은 물건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을 뭘 그리 알뜰하게 모으고 종종거리며 살았을까? 작은 물건, 작은 마음, 작은 추억들. 일상에 함께 했던 작은 것들이 소중했다는 것은 왜 죽음의 문턱에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더 큰 것, 더 높은 곳, 더 멋진 추억을 찾아 삶을 다 소비한 후에야 부질없었음을 말하게 된다.

바람이 빼앗아 달아났던

작은 풍선을 다시 찾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 번쯤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쯧쯧, 여기에 이제 어린애는 없단다.” (7연)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이혜숙은 천국에서의 삶을 80대로 선택한다. 먼저 죽은 남편이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했던 나이다. 그 역할을 연기한 원로배우 김혜자 씨는 인터뷰에서 말한다. “나는 아홉 살쯤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때는 무엇을 해도 혼나지 않고 사랑스럽게 봐주시던 때였잖아요.”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은 풍선을 사달라고 졸랐다. 어른의 생각으로는 전혀 쓸모없는 것들이라 실랑이하다가 사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빼앗기고는 앙앙 울어댔다. 똑같은 풍선을 손에 쥐고 나서야 울음은 그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풍선도 잊고 잠들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은 잃어버려도, 빼앗겨버려도 되찾아 주던 든든한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는 내내 손에든 풍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투쟁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가 어느날 문득 뒤돌아본다. 무엇 때문에 아득바득 살고 있는지. 가장 소중했고,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어린애 시절 바람에 빼앗겼던 풍선처럼 별것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마음이 익었다는 증거다. 다만 그때가 죽음의 목전에서 뒤돌아보는 순간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거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내게 귀뜸해준다.

‘죽음에 이르러서 우리가 기억하게 되는 것은 살면서 하찮게 여겼던 아주 작은 것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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