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
Rabanal del Camino ~ El Acebo (1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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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길 시작부터 그림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저 멀리 끝도 없이 펼쳐진 부드러운 산의 능선.
그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들.
그 모습을 바라보고 걷자니 행복이란 이런걸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내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
왜 눈물이 나는걸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혼자만 이 풍경을 보고 있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함께 보고 싶은 누군가가 생각이 나서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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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별을 경험했다.
4달 간 홀로 유럽배낭여행을 떠난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는 출국 한달 남은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이유가 궁금해 무작정 그의 집 앞에 서서 기다렸다.
한참 기다린 끝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여행을 떠난 네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기다리기 무서워.’
자신은 임용고시 공부에 매진해야하는 3학년인데,
여행을 떠나면 내가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까봐,
기다릴 자신이 없어서 연락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의 말도 이해가 갔다.
여행을 떠나는 건 순전히 내 욕심이니까.
여행을 떠나기 전 그에게 생일 선물로 주려고 사둔 시계를 결국 가방속에서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에게 알겠다고, 잘 지내라는 말로 등을 돌리고 서로 헤어졌다.
슬펐지만,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 앞에 눈물이 나는 걸 보면 괜찮은 척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속마음을 들은 까미노 길동무 미선언니와 요코는 그런 놈 따위 쿨하게 잊어버리라고 나에게 조언해주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저 멀리 커다란 십자가가 보였다.
일명 ‘철의 십자가’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올라가 저마다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배낭 속에서 메모 하나를 꺼내 움켜쥐었다.
그 메모는 내가 까미노를 걸으면서 느꼈던 생각과 바람을 담은 종이였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누군가가 자신의 소망을 가득 담아 쌓기 시작한 돌무더기 안에 쪽지를 묻을 심산이었다.
그렇게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씩씩하게 철의 십자가로 향했다.
그리고 쪽지를 꺼내 읽고 잠시 묵상을 했다.
막상 올라서니 단 하나의 생각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이 곳에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있던 내가 이역만리 유럽으로 건너와 그것도 까미노를 두 발로 걸으며 이 곳에 올 수 있었던 사실,
그 자체로도 감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오기까지 나를 믿어줬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철의 십자가 앞에서 들리지 않는 서로의 기도를 응원하며 잠시 머물렀다.
이제 산티아고까지 222km.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