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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닭 Sep 19. 2022

행복함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이 실례인 세상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의 맞벌이 탓에 어린 시절을 조부모와 함께 보냈고,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는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는 그림의 배경 같은 보호자로 여겨졌을 뿐,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할 생각은 못했다. 어느새 세월은 흘러 할아버지는 야위어가셨고, 병상에만 누워계시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병문안오는 가족조차 점점 잊어가셨지만, 마지막까지 아끼던 손주는 알아보시곤 했다.

  막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던 어린 나는, 할아버지가 병상에 눕고 나서야 개인적인 질문을 처음으로 건넸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


  나는 할아버지가 행복한 기억을 되새기시며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으시길 바랐다.

  할아버지는 먼 허공을 보며 답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거 기억하지..? 그때 부산에서 울산을 왔다 갔다 하며 엄청 힘들게..."


  나는 "행복"에 대해 여쭤 보았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삶을 반추하며 힘들었던 삶을 기억해 내셨다. 생각의 방향을 읽은 넋두리는, "힘들었어.."라는 한숨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할아버지는 점차 야위어가셨고, 나중에는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끝내 나는 할아버지의 행복에 대해 들을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행복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행복'이란 단어를 들으면 따뜻하게 채워지는 충만함보다, 노이즈 낀 화면처럼 거슬림이 먼저 느껴지게 되었다. 분명 할아버지에게도 행복했던 순간은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할아버지는 행복을 떠올리지 못하셨을까?


  어느 날 나는 승진을 앞둔 높은 상사와 회식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이 상사는 술에 취한 채 자신의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함께 회식에 참여한 젊은 동료는 상사의 이야기를 듣고 질문했다. "행복하시냐"라고. 상사는 술에 잔뜩 취한 채 횡설수설하였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이어 사수에게 불려 갔다.


  사수는 에게 말했다.


  "행복하냐는 질문이 다른 사람에겐 실례일 수 있다."


  나는 이를 멀리서 들으며 멈칫했다. 개인의 감정에 대해 묻는 게 사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아닌 '행복'에 대해 묻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일인가? 다 큰 어른들에게 행복은 즐기는 것이 아닌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마시멜로를 기다리는 아이에게, "왜 너는 지금 마시멜로를 먹지 않니?"라고 물으면, 어른이 자신을 놀린다 생각하며 째려보는 아이처럼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 받아들이는 이가 잘못된 것인가?


 누구의 잘못이었든 간에, '행복'이 민감한 주제로 다시 태어난 것이 분명했다.




행복하신가요?


  이 사회에서 '행복'에 대한 질문은, 자신의 현실적 어려움이 뭔지 먼저 돌아보게 만든다.

  가지지 못한 채 희망고문만 하는 '행복'은 이젠 그저 천덕꾸러기 신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행복'을 터부시 하는 사람들은 그저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이 기본적인 의식주가 충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높은 부와 명예를 좇으며 숨 가쁘게 달려간다. 이 주자들은 오히려 관람하는 나를 욕한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 나중에 후회할 거다"라고.

  하지만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기 힘들다. 앞만 보도록 옆을 가린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사람들은 세상을 '나'와 '적'으로 구분하는 듯하다. 삶의 방식은 각자가 다양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겠지만, 나에게 이런 사람들은 행복이 아니라 '성공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는 "진짜 행복을 모른다"며 '적'들을 경쟁자 혹은 도태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행복을 놓치지 말자


  내가 봐온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주변 상황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다. 혹자는 그들이 돈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기본적인 의식주만 충족된 상태에서도 여유를 가진 사람은 많았다. 이렇게 여유를 가진 사람들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그들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스쳐 지나가는 행복을 붙잡는 능력이 탁월했다. 선천적인 재능이든, 노력으로 갖춘 능력이든 그들의 능력이 현실을 초월한 여유를 준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한때 온라인 세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욜로(YOLO), '소확행'도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현실에 매몰되는 나 자신을 챙기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행복을 붙잡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갓 구운 빵의 촉촉한 결을 느끼는 것이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푸른 하늘에 감탄하든, 친구의 선물에 따뜻함을 느끼며 감동하는 것이든 말이다. 소소한 행복은 꽉 쥐지 않으면 모래처럼 손틈새로 흘러내린다. 우리는 이러한 작은 행복을 어떤 형태로든 저장해야 하는 것이다.


  작아 보였지만 지금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일 수 있기에 특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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