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닭 Feb 13. 2023

걸음

아빠 제발 같이 가시라고요!

아빠의 걸음



  아빠가 퇴원하기까지 간병인으로서 몇 주의 시간을 보냈다. 아빠를 의식하며 이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내가 본가에서 생활할 때도 각자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나와 자주 다투는 포인트들을 인식할 수 있었다. 퇴원 후, 대화나 행동 등에서 보인 아빠의 습관과 경향성을 정리하여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엄마는 무릎을 치며 격한 공감을 보이셨다. 그러시고는, "내가 몇십 년 동안 생각하고 겪은걸 며칠 만에 정리했냐"면서 즐거워하셨다.

  아빠가 보인 여러 경향성 중 하나는 '걸음'에서 드러났다.



나란히 걷기



  아빠는 동행자와 나란히 걷지 않는다. 입원 전 아빠가 나와 지내는 동안, 나는 아빠에게 새로운 경험들을 가지실 수 있도록 다양한 음식과 놀이문화를 즐기러 다녔다. 그러나 이동할 때,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장소를 알고 가는 건 나인데, 아빠는 나보다 먼저 성큼성큼 전진하셨다. 길도 모르시면서 어딜 자꾸 가시느냐 여쭤봐도 머쓱하게 웃으실 뿐, 그저 전진하셨다. 입원을 앞두고 계신 몸이라 걱정이 되어 아빠의 옷을 잡고 옆에서 나란히 이동했다. 그러다 보면 나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로 옆으로 이동하시곤 하셨다. 이건 아빠의 몸상태와 상관없이, 옆에서 걷는 나를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였다. 걸음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몸이 불편한 건 아니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 부분에 대해 아빠에게 말씀드리니 되려 화를 내셨다. 네가 옷을 잡아당겨서 그러지 않냐고. 나는 옷을 꼬집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저 황당했다.

  되돌아보면, 아빠의 걸음에 대한 불만은 예전부터 있었다. 드물게 가족이 모두 모여 외출을 나가는 날, 아빠는 항상 저만치서 혼자 앞으로 가셨다. 뭐가 그리 급하신지, 남은 가족이 어디까지 따라오는지는 신경 쓰지도 않으셨다. 한참을 가시다 뒤돌아보시곤, 가족의 느릿함을 탓하듯 쳐다보셨다. 대체 왜 가족과 함께 가시지 않는가? 아빠면 엄마를 제일 먼저 챙기셔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아빠의 바쁨에 시위하듯, 엄마 옆에서 느긋하게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고로 형은 제일 뒤에서 혼자 폰을 하며 따로 움직였다.

  사실 무엇보다 아빠와 형의 걸음이 스트레스가 되는 건, 걸음이 상대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앞서 나가는 아빠의 발걸음은 가족보다 목적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폰에 빠져있는 형의 뒤쳐진 발걸음은 가족보다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의 행동을 존중해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적어도 가족이 함께하는 순간만큼이라도 서로에게 집중하길 바란 건 내 과한 욕심일까. 나의 소중한 가족들이, 기본적인 배려조차 인식하고 있지 못한 점이, 창피한 게 아니라 안타까워서 혼자 애타게 된다. 작은 부분만 바뀌어도 훨씬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데 말이다.

  위와 같은 생각들 때문에, 나는 동행자와의 걸음을 의식하는 편이다. 물론 일반적인 동행자들에게 가족처럼 걸음의 방식을 강요하진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다. 남에게 바라고 싶은 점은 내가 먼저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 바깥에서 이동하고, 옆으로 비켜 이동할 때 동행자가 움직일 공간을 먼저 만들어주며, 나아가 발걸음 자체를 상대에게 맞추기도 한다.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진폭이 상대와 같아지면, 한결 안정적으로 상대와 눈을 맞추고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몸에 베일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앞서 걷기



  한편, 아빠와 돌아다니며 걸음에 대한 또 다른 깨달음도 얻게 되었다. 한참 아빠와 걸음 때문에 투닥거리던 나는, 토라진 마음에 아빠를 잡던 손을 놓고 이동했다. 처음 가보는 낯선 길이라 지도를 수시로 확인해야 했고, 몸이 좋지 않은 아빠가 헛걸음을 하시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그렇게 이동에만 집중하던 나는 어느새 아빠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아빠의 느린 걸음을 탓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뒤쳐진 가족을 탓하는 행동은, 내가 고치고자 했던 아빠의 모습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걸음에 대해 열변을 토한 마당에, 내가 뒤쳐진 가족을 탓하려 한 점이 매우 부끄러웠다. 또한, 한눈에 보인 아빠의 전신은 낯설도록 왜소하여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빠의 등을 보며 이동하는 게 익숙해서 그럴까, 아빠의 정면을 온전히 눈에 담았다는 것으로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다. 뒤따라 걷거나, 나란히 걸어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보다 앞서 걷는 아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앞서 걷는 건 책임감의 걸음이었다. 앞서 걷는 사람은 무리의 방향을 정하게 된다. 뒤따르는 사람들은 경로에 대한 고민 없이, 앞사람에게 선택의 책임을 넘긴 채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앞사람은 1인분 이상의 책임감을 가지고 무리를 이끌게 된다. 앞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면, 여러 쌍의 눈들이 의심 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한다. 무언의 압박 때문에, 앞사람은 걸음에서 머뭇거림을 지우고 박차를 가하게 된다. 책임감이 과중할수록, 섬세하게 일행을 배려하는 건 힘들다. 당장 자신의 어깨에 여러 명의 신뢰가 얹어져 목적에만 집중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빠도 그러셨을까? 리더로서의 경험이 적은 나는, 이제야 아빠의 걸음을 되새겨 볼 수 있었다. 나는 수십 년을 갈고닦아온 책임의 걸음을 너무 쉽게 탓했다. 대신 고마움을 먼저 표현한 뒤, 아빠의 어깨에 눌어붙어 굳은 책임감을 조심스레 떼어내야 했다. 제 혼자 다 컸다는 듯 떼를 쓰는 내 모습을 본 아빠가, 어깨의 짐을 넘겨주기는 쉽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 어깨에 놓일 여러 책임감들을 걱정하시며, 자신이 짊어진 짐까지 넘기고 싶진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아빠의 걸음에 녹아 있었다.



함께 걷기



  사소한 발의 움직임에 집착하다 보니, 더 큰 가치와 사람에 소홀했다. 나란한 걸음에 묻어난 배려도 좋고, 앞선 걸음에 묻어난 책임감도 멋지다. 그러나 나란히 걷든 앞서 걷든, 결국 함께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함께 걷는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을 마음에 새기고, 동행자들에게 소홀히 하지 않도록 책임감을 가지고 배려하기. 힘든 길이지만,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다. 아빠와의 밀착생활은 나에게 이러한 깨달음들을 주었다. 가족들에게 잘해야지. 마주하면 또 투닥거릴 테지만 감사함을 새기고 표현하자.


  함께 걷는 길은 결국 끝이 있으니

  동행하는 순간과 사람을 사랑하자


작가의 이전글 귀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