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 이야기] 아빠 없는 서러움

남편 없는 과부와 아빠 없는 아이는 벌레만큼의 취급을 받던 시대

by 유행에민감한여자

아빠의 장례를 치른 후 나는 바로 학교로 돌아갔다.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능사였을까 싶기도 하다. 학교에서는 나의 슬픔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복귀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은 너무 슬픈데, 이런 마음을 나눌 사람이 어디 한 명도 있지 않았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었겠지만 나에게 티를 내지 않았고, 나도 그들에게 티를 낼 수 없었다. 내 마음은 무너지는데 세상은 아무 일이 없는 듯이 돌아간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고 나는 그 어린 만 10살에 알게 된 기분이었다.


그 후로도 성장하면서 아빠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는 누가 먼저 물어보지도 않았고,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집에 와서도 아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도 너무 슬픈 일이고 엄마에게도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었다. 서로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그냥 봐도 너무 힘든 미망인이었다. 이때는 애도 기간을 갖는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렇게 크나큰 슬픔은 우리 가족사이에서 울음을 터뜨리지 말자는 암묵의 동의처럼 자리 잡았고 아무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애도라는 것이 뭔지도 알지 못한 채, 혼자 마음속으로 슬픔을 묻어두면서 자라게 되었다.


또 엄마는 사고 이후 한동안 유가족연대에서 활동을 하셨다. 어느 순간부터는 유가족 대표를 맡았다고 하고는 서울로 올라가서 시위도 하셨다. 하루는 어떤 어른 손에 이끌려 서울로 올라가 어느 건물 위에 올라가서 유가족의 시위 모습을 직접 지켜봐야 했었다. 시위대 주위에는 경찰도 깔려있었고, 다소 격하게 진행되기도 했던 것 같다. 보는 내내 마음을 졸였는데, 엄마가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는 건 아닌지 너무 걱정이 되었다. 난 아빠도 잃었는데 엄마마저 잃을 것 같은 불안한 마음만이 기억이 난다.


나에게도 큰 상처였지만, 엄마도 아빠가 돌아가신 다음에 큰 변화를 직접 겪은 피해자였다. 남편을 잃은 과부는 당시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주변 사람들은 한순간에 남편을 잃은 엄마를 등한시하거나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 믿었던 교회 사람들마저 그렇게 등을 돌리는 것을 경험한 엄마의 충격은 아빠를 잃었을 때만큼 컷을 것 같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중학생 때 다니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더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대충 이해하는 상황은 이랬다. 주변 지인만이 아니라 친척 할 것 없이 사람들이 가한 지금으로 말하자면 2차 가해는 지금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을 것이다. 인식 자체가 30년도 더 전에는 과부와 아빠 없는 아이들에게는 가혹했다.


그런 상처들을 끌어안고 사는 엄마는 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신체적인 아픔도 늘 달고 사셨다. 엄마는 만성피로에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생계도 책임져야 해서 일까지 그런 몸으로 하셨으니, 집에 돌아와서는 저녁시간을 대부분 방에서 안마침대 위에 누워서 지내셨다. 엄마는 이유도 모르고 항상 아픈 것같이 사셨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게 우울증 증상이었던 걸 내가 겪어보니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엄마한테 왜 그때 치료받지 않았었냐고 물어보았다. 엄마도 당시 정신과에 다니기도 했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당시 정신과에 가는 것 자체가 터부시 되던 시대였고, 정신과 치료에 그렇게 효과가 없다고 엄마가 생각하셨는지, 몇 번 가다가 못 가셨다고 하셨다. 무엇을 하든 지금보다 환경이 열악하고 사람들의 온갖 안 좋은 시선들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살아야 했던 시대였다.


내 학창 시절 친구들은 다행히 나에게 아빠가 없다고 나를 따돌리거나 그러한 이유로 등지는 일은 없었다. 나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냈고, 나는 덩치도 있고 공부도 꽤나 했어서 남이 나를 따돌릴만한 나약하게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친구들 엄마들도 공부도 잘하고 반장이었던 나와 노는 것을 흡족해하는 편이었다. 학교에서도 나에게 신경 써줘서 어떤 날에는 장학금도 주었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아빠가 없음으로 형편이 어려워진 건 사실이지만 장학금을 받는 것이 그렇게 기쁘지 않고 조금 부끄러웠다. 아빠 없는 불쌍한 아이가 되는 것 같아서 싫었던 모양이었다.


오히려 나에게 가혹했던 건 사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던 때에 어느 중소기업 면접을 보러 갔었다. 그 면접 자리에서 나를 간 보려고 일부러 압박질문을 했던 건지 아니면 면접관의 소양이 그 모양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면접관이 ‘아빠 없이 자라서 제대로 자랐겠냐’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었다. 지금 같으면 기가 차고 기자에게 제보하면 뉴스에 나올법한 일이겠지만 2000년대 중후반 때만 해도 충분히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 때였을 것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 해봤자 지금 보면 너무 어리고 경험 없는 애나 다름없는데 그런 말을 면접자에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애송이였던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면접을 마쳐야만 했다. 면접에서 나오니 면접비로 봉투를 주었는데, 정말 뭐 같지도 않은 중소에서 면접비 조금 쥐어주면서 그런 상처를 주나 싶었지만 봉투는 받아 들고 나왔다. 지금 나 같았으면 면접관에게 쏘아붙이면서 어떻게 되어먹은 인간성이길래 무례하게 그런 말을 던지냐고 하겠지만,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는 그대로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자라면서 아빠 없이 자란 사람이라는 말 들을까 더 반듯하게 살았고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원해서 아빠가 없는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아빠가 없어서 불쌍한 것도 아닌 ‘제대로 크지 못한 ‘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편견은 당시에도 팽배했고, 지금도 아직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배움이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전 05화[유가족 이야기] 더욱 선명해지는 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