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풍금이 한두 대이던 초등학교 시절에 음악 시간이면 남학생들이 풍금을 나르곤 했다. 남자 선생님 한 분과 덩치가 큰 남학생 셋 정도가 달라붙어 간신히 날랐다. 힘들고 무겁게 나르니 쉽게 다른 반으로 옮기기가 어려웠다. 그런 까닭에 한번 우리 교실에 온 풍금은 일주일 정도 우리 교실에 있었는데, 그때 풍금에 관심 있는 아이들이 선생님 몰래 풍금을 쳤다. 나도 그중 하나였는데 한 아이가 치는 곡을 외워서 따라서 쳤다. 당시 가장 인기있는 곡은 ‘고양이의 춤’인데 주로 검은 건반을 이용해서 연주했다. 교회 다니는 친구가 배워와서 학교에서 자랑하는 것을 배우는 수준이었다. 나중에 피아노를 배워보니 검은 건반만 이용한 곡는 내림마장조 같은 굉장히 어려운 장조였다. 여하튼 어깨 너머로 풍금을 배우고, 서로 풍금치려고 엉덩이로 밀고 싸우던 시절이었다.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들은 아무 건반이나 누르고 도망가서 철든 여학생들이 눈을 흘기곤 했다.
뭐든 부족하던 시절이지만 아이들에겐 꿈이 많았다. 나도 간절한 열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피아노 연주였다. 집에서 음악책을 펴놓고 책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하고, 책상 위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상상의 연주를 했다. 머릿속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엄청 어려운 곡이 둥둥 떠다녔다.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졸랐지만 생계에 바쁜 부모님은 관심이 없으셨다. 그러던 어느날 큰올케가 안타까운 시누이의 사연을 듣고 피아노 학원에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늦둥이라 큰올케랑 24살 차이가 난다. 6학년때 일이었으니 올케언니 나이 37살에 시누이를 위해 그런 결심을 하셨다. 너무 신나 학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담임선생님께 자랑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선생님도 무척 기뻐하셨다.
집에서 학교까지 30분을 걸어다녔는데, 피아노 학원은 집과 반대방향으로 30분 더 걸어가야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열망에 힘든 줄 몰랐다. 걸어가기도 하고, 가끔은 50원씩 차비를 내고 버스를 타기도 했다. 그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배웠다. 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실제로 피아노 치는 것은 책상위에서 제멋대로 손가락을 놀리는 것과 아주 달랐다. 달걀을 살짝 쥐듯 두 손을 오그리고 건반 하나에 손가락 하나씩 올려가며 집중에서 눌렀다. 처음에는 오른손 연습, 그리고 왼손 연습, 드디어 짧은 곡이지만 양손으로 연주하던 순간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른다. 스타카토, 트릴 등 여러 음표도 배우고 마치 언어를 배우듯 몸에 익혔다. 모든이의 로망인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은파를 섭력하고, 가곡집, 명곡집, 소나티네, 성가 등을 치며 마치 연주가라도 된 것처럼 폼을 잡았다. 중학교 때는 리차드 크라이더맨의 피아노 연주 테이프를 (친)언니가 사주었는데, 듣다 보니 나도 칠 수 있을 것 같아 악보집을 구해서 쳤다. 러브 이즈 블루, 사랑은 핑퐁과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머릿속엔 리차드 크라이더맨과 같이 연습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어설펐다.
열심히 치다보니 진도가 다른 학생들보다 빨라 신동이라는 말도 들었다. 이때 내 자존감이 무척 올라갔다. 당연히 나는 피아노 신동은 아니고 배움이 빠르다는 칭찬이었다. 체르니 40번을 치는 중간에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그만둘 때까지 올케언니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학원 다니는 내내 올케언니는 학원비, 책값을 모두 내주셨다. 올케언니는 큰그림을 그리셨는데 바로 나를 성당의 반주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엔 내 친구가 토요일, 일요일 미사에서 모두 반주를 했는데 내가 토요일 낮 학생미사 반주자로 발탁되었다, 엄마 대신 큰올케의 치맛바람으로! 가끔 성인미사도 참여하긴 했지만, 그 친구가 워낙 발군이고 나는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고향 성당과 멀어졌다. 짧지만 약 2년 정도 반주자로 활동한 이력이 올케언니의 마음을 채워드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올케언니는 나를 위해 영창 피아노 한 대를 사주셨다.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이종철 신부님의 특별한 부탁으로 이천 공장까지 가서 좋은 피아노를 고르셨다고 한다. 세상에 어린 시누이를 위해 이렇게 투자하는 올케언니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주신 큰올케도 나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