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나에게도 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에 원칙을 지키면 후회가 없다. 빈이가 왔을 때 나는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 고양이 구조 후 2주 격리의 법칙을 어긴 것이다. 빈이가 우리 집에 온 이상 내 뜻대로 격리를 진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미숙한 나는 구조자님의 의견에 따르고 말았다. 결국 뼈저린 고통을 겪고 나서야 내 삶과 관련된 일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원칙이든, 내가 정한 원칙이든 마땅히 지킬 것은 지켜야 후회하지 않는다. 미숙한 나에게 가르침을 주고, 아직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는 빈에게 미안하다.
구조 당시 빈은 생후 40일차였다. 우리 집 안방 화장실에서 격리를 시작했다. 작은 상자 두 개, 담요, 깔개, 고양이 화장실, 식기 등을 구비하고, 불도 켜두었다. 빈이는 작은 화장실에서 적응하여 혼자 먹고 잘 놀았다. 그런데 구조자님이 자꾸 나를 설득했다. 고양이 성장이 매우 빠른데 아기고양이를 2주간 화장실에 두면 예쁘게 크는 모습도 볼 수 없고, 아이도 답답할 테니 자꾸 밖으로 내놓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래도 감염이 걱정된다고 했더니, 심각한 병에 걸렸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라면서 괜찮다고 그러셨다. 당시 나는 우리집을 두고 33평 집으로 잠시 전세 살러 나갔던 시절이어서 안방 화장실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래도 집에 있던 고양이들을 생각하며 2주 격리를 해야하는데 워낙 구조 경험이 많은 분이 조언하셔서 고민이 컸다. 고민 끝에 결심했다. 그동안 홍이와 밀이는 꼬박꼬박 예방 접종도 했기에, 숙고 끝에 격리 4일차에 빈이를 씻기고 우리 아이들과 인사시켰다.
빈이는 여기저기 누비며 좋아했지만 홍이가 힘들어했다. 자주 토하고 얼굴이 핼쑥해졌다. 홍이가 힘들어한다니 구조자님이 여기저기 입양 홍보를 하여 금방 입양자가 나타났다. 일산 쪽에 사시는 젊은 부부가 빈이 또래의 하얀 고양이를 키우고 계시는데 검은고양이 빈이가 딱 어울릴 것 같다고 데리러 오시기로 했다. 막상 입양이 확정되니 우리 딸이 너무나 정이 들었다고 입양을 원했다. 할 수 없이, 너무나 죄송했지만, 중간에 입양을 취소하고 빈이를 우리 셋째로 들였다. 빈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때 빈이를 보냈으면 빈이는 건강했을까, 아니면 그곳에서도 이렇게 아팠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익숙한 우리 집에서 있다가 고양이별로 간 것이 나았을까.
빈이 그리울 때 가끔 영상을 본다. 유난히 밀과 빈이 힘차게 뛰어노는 영상이 많다. 2022년 5월 26일 밤 9시 30분, 자매의 추억이 너무나 소중해 시간까지 기억하는 날이다. 그날은 빈이 우리 집에 온 지 2주째 되는 날이자, 입양보내기를 포기하고 우리가 빈이를 정식 입양한 날이다. 그날 빈이는 2주 격리를 마치고 처음 밀을 만났어야 했지만 이미 밀과 놀고 있다. 두 달뒤에 나는 애가 끓게 울어야 했다.
빈은 7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5월 12일에 구조되었으니 겨우 두 달 정도 함께 지낸 뒤였다. 병세가 너무 급히 진행되어 병원에서는 검사도 제대로 못하고, 코로나바이러스, 황달 등 여러 가지 추측만 남겼다. 열흘 전에도 병원에 가서 진료도 받았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빈이가 이상하게 점점 기운이 없더니 그날 아침엔 움직이지도 못했다. 동네 병원에 갔더니 쇼크 상태라며 큰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한다. 병원 갔을 때 그날따라 개 환자가 많아서 30분 넘게 기다렸는데, 잠깐 나와서 보시기까지 했는데, 우리 차례가 되어 진료실에 들어가자마자 그런 말씀을 하셔서 은근히 화가 났다. 진작 얘기해주시지. 그래도 큰병원으로 전원조치를 잘해주셔서 도착했을 때 바로 진료를 볼 수는 있었다. 호흡이 곤란한 상황이라 하루 26만원인 산소방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당연히 산소방에 넣었다. 하루 입원비 26만원이 참 비쌌지만 필요하다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이만 나을 수 있다면 되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좋은 시설에 들어왔으니 적절히 치료받으면 나을 것으로 생각했다.
산소방에 들어간 빈을 보러 들어갔더니 누워있던 빈이 우리를 알아보고는 힘겹게 일어났다. 나는 빈이 괜히 일어나서 기운을 소모하고,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안 되니 얼른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에 여기서 잠깐 쉬고 있어, 엄마 금방 또 올게, 라며 간단히 인사하고 얼른 나왔다. 후에 나는 이 행동을 무척 후회했다. 빈이의 따뜻한 눈동자를 다시는 못 보았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빨리 나가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있을 만큼 있어도 된다고 했는데, 나의 경험 부족으로, 빈이 쉬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나왔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줄 걸, 어린 아이가 낯선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슴이 메인다. 어쩌면 그런 낯선 환경에 가지 말았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해 군에 간 아들이 코로나로 휴가도 못 나오다가 모처럼 나와 있어서 집에 와 있었는데, 빈이를 두고 온 지 두 시간 만에 위급 상황이라고 호출이 왔기 때문이다.
10분 만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빈은 이미 심장이 멎었다. 몸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삶과 죽음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두 시간 전에 봤던 따뜻함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빈이가 사망한 뒤 나에게 한가지 선택이 더 남아있었다. 빈이 사체를 병원에서 관리해줄 수도 있고, 화장을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병원에서 처리해 주신다는 것은 병원 폐기물이 된다는 의미였다. 나는 화장을 선택했다. 빈이 좋아하던 사료를 마지막 식사로 준비하고 병원의 주선으로 알게 된 화장장으로 갔다. 굽이굽이 양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처량했다. 나는 운전하고 옆에 앉은 딸이 빈이를 안고 있었다. 빈이의 몸과 마지막 인사를 하던 뜨거운 순간, 더 뜨거운 불길로 들어가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던 마음, 뼈가 되어 나온 빈이를 맞이하던 순간, 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담긴 빈을 안고 다시 산 넘어오던 길이 마음속에 굽이져있다. 그날 많은 돈을 쓰고도 결국 빈의 유골함을 들고 허망하게 집에 왔다. 내 땅을 사면 빈을 묻어줄 것이다. 여엿한 내 터가 생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