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다시 가고 싶은 시간
이런 공상을 즐긴다.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시공간이 휘어져 과거와 조우한다면 나는 언제로 갈까? 엄마가 ‘있는’ 때로 가고 싶다. 영화'마더'에서 말하던 ‘너 엄마 없어?’ 3년차이다. 엄마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또박또박 새겨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텅 빈 가슴이 매일 말해 준다. 그리움이 짙어지면 나는 점점 투명해진다.
김이듬의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를 읽다 첫 페이지부터 놀랐다. 담담하게 읽어 가던 「블랙 아이스」에서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는 문장에 한 대 맞았기 때문이다. 곧이어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와 같은 문장엔 가슴이 쓰리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가진 군상들은 언제나 많았지 싶다.
방
시집의 1부에서는 유난히 ‘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방은 나를 지켜주는 곳이기도 하면서 남에게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떠넘기는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종류의 방인 식당은 홀로 앉아 식사하던 화자가 독립선언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의 것도 되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와 밥을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떠나기 전날에도
의자가 많은 식당처럼 적적한 마음에
모르는 노래가 부서진다
축축하지만 덜 익은 면을 뒤적거린다
― 「나는 영원히 누구의 것도 아니고」 일부(39~40쪽)
나도 엄마
나도 엄마가 되었는데, 딸 태몽에 한국에서는 보기 어려운 동물이 등장했다. 악어였다. 햇빛 가득한 마당에서 남편이 비질을 하는데, 어두운 수챗구멍에 있던 커다란 악어가 나왔다. 내 눈에 남편도 보이고, 수챗구멍 속 악어도 보였으니 참으로 신기했다. 여하튼 악어가 남편을 찾아 햇빛 속으로 기어나오는 극적인 장면에서 잠결이지만 태몽임을 알았다. 악어띠는 아니지만 용띠 딸을 얻었다. 태몽이 왜 남들처럼 복숭아같은 예쁜 과일이 아니었을까? 왜 하필 수챗구멍이지? 좀 더 아름다운 태몽을 선사하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다 만난 시 한 구절에 25년간 갖고 있던 의문이 풀리는 것만 같다. 아마 우리 딸이 태어난 길이었나보다. 딸은 이제 환한 길을 걷고 있을까?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 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 「블랙 아이스」 일부(16~17쪽)
길
방이 확장되어 길이 된다. 지나온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일방통행이다. 시인은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나의 행성’으로 삶을 표현했다. 이 행성은 늘 돌고 있어서 도는 줄 모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멈추면? 나랑 멀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될 때 기어코 나로부터도 멀어지는 화자가 등장한다.
북극여우도 살지 않는 설원에서 길은 끝나고 심장과 마음을 잇는 선이 사라질 즈음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떠나온 거기에서
그 극지의 눈보라 속에서 너에게 미래를 부칠 수 있다면
― 「일방통행로」 일부(43쪽)
지금처럼 돌면 되는 걸까? 역류하면 큰일난다는데 시간은 한 번쯤 거스를 순 없을까? 언제쯤 시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다시 엄마
2부를 읽다 보면 시인의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말장난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말장난 같으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구절이라니. 4호선의 끝 오이도에서 날아온 문장이다.
큰맘 먹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여긴 생-말로 같아
우리가 몽생미셸 갔다가 들렸던 해변
아이를 다른 나라로 보낸 엄마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서
생은 말로로 가는 미로 같고
왠지 나는 마음이 놓였다
― 「오이도, 생 말로」 일부(67쪽)
시를 읽으며 내 인생의 여러 편린을 만났다. 이번엔 그때가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오지 말라고 할 때였다. 알았다고, 괜찮다고 대답하며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 말을 내게 전해준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의 의견은 아니었기에 엄마도 가슴이 아팠다.
너는 내게 올 수 없으니까 북극한파처럼 그곳의 공기를 내게 보내 주는 거지
오지 말라는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섭섭한 눈보라
― 「북극한파」 일부(69쪽)
여러 자녀 앞에서 악역을 해야만 했던 엄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엄마와 떨어진 게 불안하다. 오십 넘은 딸에게 아흔의 엄마가 아직도 속삭여주는 것 같다.
떨지마
우리가 헤어지는 게 아냐
― 「막간극과 불리불안」 일부(138쪽)
시간을 휠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엄마 있는 시절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