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오빠는 우리 집 넷째로 나보다 일곱 살이 많다. 내가 아홉 살일 때 중학생인 오빠는 머리를 박박 밀었다. 작은 키에 외까풀 눈이 반짝거렸다. 오빠는 근처 마을이 모두 놀이터일 만큼 잘 돌아다녔다. 친구도 많아 저녁마다 집으로 친구들이 찾아와 휘파람으로 불어내었다. 난 밤마다 놀러 나가는 오빠가 늘 걱정스러웠다. 혹시 싸우거나 밤의 사나이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를 했다. 사람들을 잘 웃기고 집안일도 잘 거들어 동네 어른들이 오빠 칭찬을 많이 했다. 반면 나는 집에만 있어 동네 어른들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내 이름 대신 ‘00이 동생’으로 통했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오빠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발라곶에 있는 갯벌에 가자고 했다. 발라곶은 화성시 우정읍 운평4리의 별칭이다. 그곳엔 염전이 발달해 염전에 넣을 바닷물을 모아놓은 저수지도 많았다. 오빠는 그 저수지로 친구들과 낚시나 수영을 하러 자주 갔다. 친구랑 놀기에 바쁜 오빠가 그날은 어쩐 일인지 나와 낚시질을 가자고 했다. 미끼는 지렁이다. 삽과 깡통을 들고 이웃집 운창이네 도랑을 삽으로 힘껏 팠다. 그곳은 운창이네 수채가 지나는 길인데 흙으로 높이 둑을 쌓았다. 윽! 징그러운 지렁이가 여러 마리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기어 다니는 것은 다 무서워하는 나는 오빠가 빈 분유 깡통에 지렁이 잡아넣는 것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바다로 가는 길은 멀었다. 약 40분을 걸어야 했다. 그 길은 샌님인 나에게 무척 생소했다. 외부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행동반경이 좁았다. 그저 우리 마을 언저리를 돌아다녔을 뿐이었다. 오빠는 자전거 뒷자리에 나를 태웠다. 지렁이가 든 깡통은 자전거 손잡이에 걸고, 낚싯대는 내가 들었다. 구불구불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면 자전거가 크게 요동치고, 덩달아 딱딱한 짐칸에 앉은 내 엉덩이가 아팠다. 오빠가 앉은 안장도 그리 푹신하지 못해 오빠도 아팠을까. 아니면 동생을 뒤에 태워 엉덩이를 거의 들다시피 열심히 페달을 밟아 아프지도 않았을까. 언덕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며 마을을 지난다. 지나가다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하는 용현이 누나를 만나 몇 마디를 나눈다. 내 친구 용현이처럼 늘씬하고 예쁜 언니가 동생이냐며 친절하게 날 바라본다. 언덕이 가팔라 걸어서 오르기도 했다. 빗물에 쓸려 후미진 언덕을 내려갈 때도 덜컹! 엉덩이가 아팠지만 오빠와 함께하는 길은 안전했다.
우리는 바다에 도착했지만, 철조망이 쳐져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염전에 물을 대기 위해 바닷물을 막아 놓은 저수지 둑에 오빠가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는 누룩지라고 부르는 망둥어 낚시다. 오빠는 지렁이를 칼로 도막 내어 낚시 바늘에 걸고 멋지게 던졌다. 나에게도 낚싯대를 쥐어주지만 서툰 나는 제대로 던지지도 못했다. 던지는 반동으로 낚싯줄 끝에 달린 지렁이 토막이 나에게 올까 봐 무섭기도 했다. 오빠가 대신 던져주고, 나는 낚싯대만 잡고 있다. 기다려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심심했다. 오빠는 가끔 고기를 낚았다. 지루해진 나는 낚싯대를 오빠에게 맡기고 갯벌로 갔다. 갯벌에 가면 우스운 모습으로 뛰어다니는 짱뚱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망둥이라 불렀는데 TV를 보니 짱뚱어란다. 갯벌 위를 튀어 다니는데 등지느러미를 높이 쳐들고 있다. 그 모습이며 속도가 참 만만한 녀석들이었다. 잡으려면 잡지만 손이 더러워질까봐 잡지 않았다. 하지만 방게는 잡고 싶어 쫓아다녔다. 어찌나 빠르게 구멍으로 들어가 버리는지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개흙을 파헤치며 구멍을 파도 꼭꼭 숨은 방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재미없어 보였는지 오빠는 조개 잡는 법을 알려주었다. 거기선 가무락이 흔했다. 가무락은 가장 불룩한 부분의 껍데기가 가장 검고 내려오면서 점점 흐려지다가 가장자리는 하얀 모시조개이다. 야트막한 저수지 가장자리로 같이 들어가 오빠가 조개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바닥에 난 구멍을 찾아 손을 쑥 넣어 조개를 찾는 것이었다. 바닥이 미끄러워 비틀거렸지만 조심해서 몸을 지탱했다. 오빠는 절대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오빠가 가르쳐주는 구멍 속으로 약 10cm 정도 손을 넣으면 영락없이 조개가 한 마리씩 들어앉아 있었다. 혼자 해보니 모든 구멍에 조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빠는 어떻게 그렇게 조개가 있는 구멍을 잘 알아보았을까. 여하튼 입을 벌리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조개가 내 작은 손에 끌려 올려왔다. 개흙을 헹구어내면 조개는 토라진 듯 입을 꽉 다물었다. 무언가 잡은 기쁨에 난 활짝 웃었다. 재미있었다. 오빠가 집에 가서 연탄불에 구워준다고 했다.
조개를 몇 마리 잡았을까, 갑자기 내가 물에 떠내려가는 것이다. ‘오빠 나 떠내려가. 무서워!’. 잔물결이 이는 수면을 보다가 내가 떠내려가는 것 같은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오빠는 떠내려가는 것이 아니니 물결을 보지 말고 바닥을 보라고 소리친다. 그래도 난 몸이 얼어붙은 듯 흐르는 물결만 보다가 어지러워 주저앉아 버렸다. 바지가 젖었다. 오빠가 바보 같다고 소리치며 나무랐다. 오빠의 야단에 놀라 난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오빠는 화도 나고 걱정이 되어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오빠 얼굴을 보니 오빠도 당황한 것 같았다. 이때다. 난 동생답게 울음을 터뜨렸다. 너른 갯바닥에 오빠와 나뿐인데다가 옷도 젖어 조금은 무서웠다. 그리고 오빠의 화를 동정으로 바꾸고 싶었다. 오빠는 나를 달래주고 엉거주춤 걷는 날 데리고 나와 낚시 도구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젖은 옷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떠내려간다는 공포심과 주저앉은 충격으로 이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빠는 그런 동생이 얄미웠을 법도 한데 그 후에도 몇 번 더 바다로 데리고 갔다. 항상 오빠 친구들과 함께였다. 수영도 하고, 커다란 말거머리를 잡아 겁에 질려 몸을 동그랗게 만 틈을 타 모래밭에서 슬리퍼로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늘 오빠보다 한참 어린 나는 바라만 보았지만 끼어주었다는 것이 고마웠고, 재미있었다.
40여년 전 갯벌이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오빠와 함께 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이다. 삶에 쫓기다 2002년이 되어서야 고향 마을에 오남매가 다 모였다. 그 갯벌이 가고 싶어 언니에게 같이 가자고 했다. 언니는 벌써 다녀왔단다. 하지만 바다가 없어졌단다. 어떻게 바다가 없어지지? 남양만 간척 사업으로 그곳 갯벌은 모두 농지로 바뀌었다고 한다. 언니가 차로 달리고 달려도 바다는 볼 수가 없어 돌아왔다고 한다. 오빠와 함께 했던 서해의 갯벌과 염전 저수지는 이제 우리 마음속에만 있다. 정말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