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내가 태어나고 16년간 자란 고향, 우리 집, 엄마 품을 떠나던 날이다.
그날 집을 떠나는 늦둥이 막내에게 엄마가 해주신 반찬이 감자조림이었다. 감자를 어슷하게 잘라 식용유로 볶다가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으로 양념해 푹 익힌 감자조림의 고소한 맛을 난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식용유의 고소함과 어우러진 감자 고유의 고소함은 소박하면서도 우아했다. 분이 많이 나는 감자는 엄마가 저으실 때 분이 조금씩 으깨져 또 다른 양념인 양 감자에 붙어 있었다. 이 감자조림을 집 떠나는 딸을 위해 엄마는 이른 저녁상에 올리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자를 좋아했다. 수확기 전에 감자 좋아하는 딸을 위해 조금씩 캐서 쪄주시던 알 감자들. 금방 캔 감자를 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기고 겅그레에 올려 찌면 곱게 분이 났다. 도시락 반찬으로 소금으로만 간을 한 감자볶음을 자주 싸갔다. 큰아이를 가졌을 때도 일요일이면 감자를 한 솥씩 쪄 먹었다. 회사 다닐 때는 별명이 감자부인이었다. 감자가 찬으로 나올 때 산더미처럼 퍼왔기 때문이다. 독일로 출장을 가면 으레 감자와 돼지고기 요리를 먹었다. 어학연수에 가서는 캐나다인 룸메이트한테 으깬 감자 요리법을 배웠다. 이렇게 나의 감자 요리에 대한 편력은 역사가 깊다.
나는 집을 떠나는 다섯 번째 아이였다. 더 좋은 학교를 찾아 나는 수원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1987년 3월 1일. 그날 밤 조암에 있는 큰 오빠 집에서 자기로 했다. 조암은 수원에서 버스로 40분 떨어져 있다. 수원에 있는 학교에 늦지 않게 가기 위해서였다. 수원에 얻은 방이 입학식 날짜와 맞지 않아 일주일간 오빠 집에서 통학을 하기로 한 터였다. 오빠 집에 가서 저녁을 먹어도 되련만 엄마는 5시 45분 차로 떠날 나를 위해 다섯 시쯤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마루에 상을 받고 앉았다. 아! 감자조림. 내가 좋아하는 반찬. 눈물이 어렸다. 밥을 먹기 시작하자 엄마는 빨랫감을 주섬주섬 대야에 담으시더니 마을 빨래터로 가셨다. 눈물의 이별을 방지하신 것이다. 그렇게 난 텅 빈 집에서 밥을 먹고 버스를 탔다.
버스는 이웃 마을을 돌아 우리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태우고 언덕을 내리 달렸다. 나무들 사이로 저 멀리 우물가에 앉아 계신 엄마가 보였다.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계신 엄마는 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셨다.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빨래만 하고 계셨다. 또 눈물이 솟았다. 속으로 17세 소녀다운 다짐을 했다. ‘엄마, 이렇게 일찍 집을 떠나서 죄송해요. 하지만 꼭 오늘의 헤어짐을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할게요. 꼭 성공해서 돌아올게요. 어스름의 저녁 버스 창문으로 눈물짓는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