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바람 속에서 내 속도로 걷는 다는 건

느리지만 천천히 뚜벅뚜벅

by 그럴 때도 있지
제주의 하늘은 자주 경이로움을 선물한다 @외도동

적게 벌어도

있는 것에 만족하며

삶의 질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고 싶었던 나.

그렇다면 지금의 내 생활은 나쁘지 않다.


피고 지는 꽃과 식물들로 계절을 실감하고

변화무쌍한 날씨가 주는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여행으로 오는 지인들 덕에 설렘도 함께 누린다.


《제주 표류기》에 나오는

막걸리를 빚어 마시고

우엉밭(텃밭)에서 채소를 길러 먹고

원두를 직접 볶아 커피를 마시는 이야기들이

제주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다.


<제주 표류기> 이끼 @애월책방 이다


나는

유채와 갓꽃, 배추꽃의 구별도 아직 헷갈리는

13년 차 제주도민이다.


제주가 좋아 곳곳을 탐색하던 시기를 지나니

맛집과 가볼 만한 곳 추천이 어려워졌고

이제는 오히려 여행자에게 정보를 묻는 도민이 되었다.

여행자였던 시절과 다르게

서귀포로 가는 길은 멀고

육지 나들이의 횟수도 점점 줄어든다.


그쳤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비 @서귀포 테라로사

비는 언제 그칠지 모르고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것,

사방에서 날아드는 비에는

우산이 소용없다는 것도

몸으로 익혔다.


섬의 날씨 정보는 믿을 게 못 된다는 말도

살아보니 알겠다.


바람에도 소리가 있어

밤잠을 설치는 날이 있고

24시간 돌아가는 제습기 소리도

이제는 익숙하다.


섬에 붙는 배송료 때문에

쿠팡을 끊을 수도 없고

밤 9시가 지나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육지의 밤 문화가 낯설어졌다.


너른 땅에 비해 인구는 적어

소문을 조심해야 하고

한 다리만 건너면 아는 사람이라

족보를 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이름 대신 ‘4·3 사건’이라 불리는 일로

한 마을이 사라진 곤을동의 흔적,

이름 없이 묻힌 희생자들의 무덤인

너븐숭이를 지날 때면

영화 〈지슬〉이 떠오른다.

제주는 아름답지만

아픈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가 제주에 사는 이유는

복잡하고 갑갑하고 빠른 속도의 도시 생활이

나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주 표류기》를 읽으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천천히, 느리게’의 삶을 다시 만났다.

처음 제주에 내려왔던 마음도 함께.

인생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뚜벅뚜벅 제 속도로 걷는다 @성이시돌목장


더디지만 꾸준한 삶.

지금의 방향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속도를 내어 앞만 보며 달리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그래서인지

대단한 계획 없이

흐르는 대로 산다.


물욕도 크지 않아

소소히 내 것과 내 사람을 곁에 두며

조용히 기회를 엿본다.


크게 소리 내지 않아도

나름의 꿈틀거림으로

나는 존재하며 산다.


두근거리는 삶을 내것이라 안고 산다 @시인의집


여행자가 오면

함께 여행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고

떠나보낼 때의 아쉬움까지도

내 삶의 일부로 품는다.


이 섬에서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기보다

무언가가 되어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나를 조금씩 나답게 만들고 있다는 걸.


빠르지 않아도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하루들이

이미 충분한 삶이라는 걸.


더 천천히, 고요히,

처음의 그 마음을 되새기며


오늘도

제주의 바람 속에서

내 속도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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