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내 몸에는 검푸른 피가 흐른다

나를 키운 해조류 반찬

by Applepie

최초의 체험적 습득을 가장 분명하면서도 가장 지우기 힘든 흔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아마 음식 취향일 것이다. 태어난 세계가 멀리 사라지거나 몰락해도 이때 습득한 내용은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며, 정말 끈질기게 그 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태어난 세계는 무엇보다 먼저 모친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또한 동시에 원초적 미각의 즐김과 최초의 먹을 것의 세계이자 원형적인 문화상품에 대한 원형적 관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이 주는 기쁨은 완전한 기쁨의 유기적인 일부를 구성하고 이러한 즐거움을 통해 쾌락을 얻으려는 선택적 취향의 일부를 구성한다. -삐에르 부르디외 저 최종철 역, '구별짓기' p.156




나는 남쪽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엄마의 음식을 먹으며 자랐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동네에서도 소문날 만큼 음식을 잘 하셨다. 바닷가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각종 해산물과 젓갈들로 맛깔난 김치와 탕, 밑반찬들을 만들어 내셨기에 외할머니댁에 갈 때면 꽉 찬 밥 한공기를 뚝딱 해치우곤 했다. 지금은 치매로 외할머니의 옛날 그 맛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나를 비롯한 외가 식구들의 몸 어딘가에 분명하게 새겨져 있을 테다.


외할머니의 손맛을 가장 많이 닮은 딸은 다름 아닌 나의 엄마이다. 엄마는 직장을 다니며 우리 셋을 키우느라 늘 바빴지만 타고난 손맛으로 맛있는 반찬들을 쉽게쉽게 만들어 내곤 했다. 바로 아래 동생은 어릴 적 고기를 먹으면 몸에 아토피가 올라왔기에 엄마가 차려내는 반찬들은 자연스레 주로 해산물, 채소 등이었는데 그 둘의 교집합(과학적으로 맞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인 해조류가 특히 우리집 식탁의 단골 메뉴였다. 엄마는 때로 큰 양푼에 말린 파래를 넣고 간장과 어떤 것들을 섞어서 뚝딱뚝딱 파래무침을 만들어 냈고 어느 날에는 후라이팬에 기름을 달구고 그것을 짭짤하게 볶기도, 또 미역을 새콤하게 무치기도, 단단한 다시마를 달콤하고 바삭하게 튀겨내기도 했는데 이것들에 가장 열광한 사람은 나였다. 나는 피와 근육에 파래와 미역, 김 등을 축적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이런 해조류 반찬이 아주 일반적이지는 않다는 걸 느꼈던 건 결혼하고 나서였다. 친정과 꽤 떨어진 동네에 신혼집을 얻어서 엄마의 반찬을 이전처럼 자주 먹을 수 없게 되었을 새댁 시절의 어느 날, 나는 파래 무침이 너무 먹고 싶어서 집 앞 큰 마트에 들렀는데 우리 집에는 늘 있던 그 평범한 말린 파래 자반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근처를 헤매다 작은 가게에서 구하긴 했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어릴때 봤던 기억으로 간장과 까나리, 물 같은 것을 넣고 무쳐낸 파래는 못 먹을 맛이었고 그걸 해결하려고 내가 뭘 손대면 손댈수록 더욱 이상해져갔다. 그렇게 나의 첫 해조류 반찬 도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10년 경력의 주부가 되었음에도 나의 요리 실력은 그닥 발전하지 못했다. 외할머니-엄마로 전해 내려오는 손맛이 내게서 끊긴 것 같아 민망한 마음도 들지만 나는 미각 같은 것을 타고나지 못한 것 같다. 간을 맞추는 감, 그런 것이 내겐 없다는 것을 10년간 그럭저럭한 요리들을 힘들게 만들어 내며 느꼈다. 10년이라는 주부 경력이 무색하게 지금도 우리집 냉장고는 주로 비어 있고 식탁의 반찬들은 자취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간장을 넣고 조릴 때는 약불로 낮춰야 한다는 기본적인 것들을 이제야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런 내게도 필살기 요리가 있다. 주위에 은근히 자랑하기도 하는 그 반찬, 바로 미역줄기 볶음이다.


미역줄기볶음이 내 필살기가 된 것은 순전히 나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내 피에는 해조류가 흐르고 있는데 반찬가게의 미역줄기볶음은 피에 새길 만한 맛이 아니었던 것. 그러다 어느 날 인스타 팔로우를 해 둔 한 할머니 요리 인플루언서의 레시피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바로 염장 미역 줄기를 사다 도전해보았고 염장 미역 줄기를 한 10번쯤 사 본 지금은 비로소 썩 괜찮은 맛을 일관되게 낼 수 있게 되었다. 20분쯤 염분기를 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결코 짧지 않은 과정임에도 나의 장바구니엔 늘 염장 미역줄기가 들어 있다. 물론 우리 세 가족중에 나만큼 이것에 열광하는 사람은 없기에 미역줄기볶음은 대개 내 차지가 되니 나의 노력 역시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 되는 셈이다. 매실청을 넣어 달착지근하고 충분히 볶아 부들부들한 나의 미역줄기볶음과 조미 안 된 김만 있어도 내게는 진수성찬이다. 이렇게 혼자 먹는 점심을 간소하게 끝내면 나의 몸에 다시 해조류가 돈다. 여섯 살의 나와 지금의 나를 이어주는 해조류 반찬으로 오늘도 나는 더 나답게 살아간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인테리어, 내겐 너무 어려운 취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