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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테리어, 내겐 너무 어려운 취향

하지만 훈련으로 조금 단련되더라고요

by Applepie

더운 여름이지만, 곧 이사를 앞두고 있다. 신축 아파트에 입주해 지금까지 9년째 살고 있는데 갑자기 20년된 구축으로 이사가려니 마음에 차지 않는 게 많았다. 그리하여 나와 남편은 빠듯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올 리모델링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사를 앞둔 주변 지인들은 거의 인테리어 공사를 고려할만큼 인테리어 공사는 마치 입주 전 필수 코스인 것처럼 흔해져 있다. 그런데 정작 나와 남편은 한 번도 경험이 없었다. 큰거 한 장이 왔다 갔다하는 견적, 한 달이 넘는 긴 공사기간, 공사가 잘못 되었을 때 감수해야 할 것들이 결코 가볍지 않아 남편과 나는 덜덜 떨고 있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인테리어에 대한 '취향'이 없었던 것이었다. 보기에 거슬리지 않으면 그냥 살면 되는거 아냐? 우리집이 쇼룸도 아닌데 아름다울 필요가 있나? 라는 무던함과 가구나 인테리어에 대해서는 10년 전 결혼할 시절에 머물러 있을 만큼의 무관심으로 살아온 나와 남편은 없던 취향과 감각을 쥐어짜서 업체를 골라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 무렵의 나는 매거진 B의 대표이자 전 카카오 공동대표였던 조수용 작가의 '일의 감각'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미팅을 했던 한 업체 대표님이 조수용 작가와 묘하게 겹쳐 보여서 그 곳으로 선택했다. 상업디자인에 잔뼈가 굵은 곳이었고 까다로워 보이는 감각이 뭔가 우리에게 부족한 면을 채워주실 것 같았다.


그런데 업체를 골랐다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골라야 할게 너무 많았던 것이다. 대표님께서는 늘 몇 가지의 옵션을 주셨고 그 안에서 나는 헤맸다. 화이트가 다 같은 화이트가 아니고 진짜 미세하게 노란빛이 도는 것, 그레이빛이 도는 것, 유광, 무광 등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실감한 나는 도배나 필름지 샘플이 담긴 두꺼운 책자 앞에서 자주 침묵에 잠겼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냥 대표님 좋은 걸로 해주세요.' 하지만 그러기엔 조금 자존심이 상했고 이런 글을 쓸 정도로 나의 취향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였으므로 난 다 똑같아 보이는 옵션 사이에서도 다른점을 찾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 중 내가 어디에 가장 마음이 가는지를 예민하게 살폈다. 사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택하는 일이 어려워 참고용으로 유튜브나 인스타, 핀터레스트를 보기도 했다. 그러다 한 유튜브 채널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소비요정의 도시탐구'라고 감각 좋은 사람들의 집을 투어하는 컨셉의 채널이었다. 감히 내가 비빌 수 없을 만큼 감각이 좋은 사람들이었고 참고하기도 힘들 정도의 고가의 가구가 즐비했지만 안목을 기른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시청했다. 그렇게 수십개의 영상을 보며 점점 하나의 생각이 선명해졌다.

'다들 자기 취향대로 사는구나. 인테리어에는 정답이 있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남의 집을 자꾸 보다보니 내 맘에 뭐가 맘에 드는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감각은 타고나는거라 생각했는데 훈련으로도 발전시킬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다.


이걸 깨닫고 나자 다음부터는 나의 선택을 얘기하는 것이 훨씬 편해졌다.

"주방쪽 문을 그냥 원래대로 살리면 어떨까요? 장 본 짐들을 바로 넣어놓기 편할 것 같아요."

"조명이 너무 크네요. 저는 단아한 느낌을 원하는데 이러면 너무 발랄해질 것 같습니다."

"안방 가구는 클래식한 분위기이니 그에 어울리게 약간 패턴이 있는 벽지가 어떨까요?"

와 같은 말을 전보다 훨씬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고른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대표님의 의중은 뭐지? 이 가구 너무 싸다고 흉보시면 어쩌지?'와 같은 불안에 압도되어 무엇 하나 자신 있게 고르지 못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태리 타일을 썼다고 좋은 욕실이 되는 것은 아니며 요즘 멋져 보이는 등받이 낮은 모듈 소파가 머리까지 기대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렇게 불완전할지라도 소신 있는 선택으로 우리 집은 조금씩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 가족만의 비스포크가 되어 가고 있다.

이사갈 곳의 3d시안. 이 제안을 바탕으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했다.


완성될 우리 집의 분위기를 생각하며 바닥재를 고르는 일이, 동시에 예산이 천정부지로 치솟지 않도록 적당한 위치에서 타협해야 하는 일이 나는 이제 즐겁다. 이번 이사로 내 취향의 어느 한 면을 희미하게라도 구축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물론 이번 공사가 끝이 아니라 살면서 우리가 집에 관해 선택해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겠지만, 또 그 선택은 언제나 어렵겠지만 미래의 나는 지금보다 더 뾰족해진 취향으로 나만의 분위기를 풍기는 집에서 살고 있기를. 그렇게 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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