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생 5학년 A는 유난히 교실에 적응이 오래 걸렸다. 아무리 전학을 왔다 해도 초등학교 교실의 규칙이라는게 별다르지 않은데다 5학년이라는 짬밥이 있기에 느리다 싶은 아이도 넉넉히 한달이면 아이들은 대개 새로운 교실에 잘 녹아든다. 그런데 A는 4개월이 지나도 반 친구들의 이름조차 잘 외우지 못했다.
A의 문제는 짧게 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웃음도 많고 부드러운 품성이라 친구들과도 금세 잘어울려 오히려 적응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A가 수업시간에 혼자 엉뚱한 곳을 펴놓거나 제시한 과제를 기억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A를 더 자세히 보게 되었다. 처음엔 적응하느라 그렇겠지 했던 나의 생각이 A가 한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자 걱정으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그땐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수업시간에 집중 못하는 아이들이야 뭐 하루이틀 보는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랬던 내가 A의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게 된 때는, A가 수업 중에 눈물을 쏟은 날이었다. 굉장히 사소한 조별 활동 후 소리없이 울던 A, 얼마후엔 체육시간에 농구 드리블 연습을 할 때였다. 한 번이라도 더 하고싶어 의욕적인 아이들 사이에서 가만히 서있기에 개별적으로 불러서 같이 해보자고 얘기해도 어두운 표정으로 고갤 돌리다 또 눈물을 왈칵, 조용한 성격의 A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울었다.
사실 그때 나는 소아우울증을 의심했다. 자신의 내면을 절대 표현하지 않는 아이가 쏟아내는 울음은 긴장이 된다. 그 감정이 슬픔인지 억울함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를 전혀 짐작할수 없고 그 깊이 또한 알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건강하진 않은 심리상황이 염려되어 어머님과 전화상담을 하였는데 '자기도 잘하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니까, 저희 애가 욕심이 많거든요. 그리고 얘가 행동이 느려요. 이해 부탁드려요.' 라며 별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어머님 말씀을 듣고 나도 소아우울증이니 불안이니 하는 말은 잊고 그에 온도를 맞췄다. 바로 A의 생기부를 열어 보았는데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매년 '행동이 느리다'는 내용이 있었다. 사실 생기부에 남는 2학기 행동특성발달에 담임은 웬만하면 학생의 단점은 안쓰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경우는 정말 개선이 필요한 항목일 경우이다. A의 경우처럼 1학년부터 그 내용이 쭉 써져 있었고 고학년이 될때까지 나아지지 않았다면 그 문제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느리다는 것이 단순히 느긋한 성격이나 습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A는 내가 보기에도 분명 성격이 느긋하고 행동이 느릿느릿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근본 원인은 아닌것 같았다. 한창 수업중인데 엉뚱한 페이지를 펴고 있거나 지시를 잘 잊어버리는 모습이 빈번한 것에 주목하자면 A는 작업기억력과 주의력이 또래보다 낮은것 같아 보였다.
작업기억력이란 정보들을 일시적으로 보유하고, 각종 인지적 과정을 계획하고 순서 지으며 실제로 수행하는 작업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기적 기억을 말한다.(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심리학용어사전) 나도 몇년전까지 생소했던 이 용어를 접하게 된 것은 학습부진 학생을 지도하는 법을 배우는 연수에서였다. 그곳에서 부진학생들은 작업 기억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을 배웠다. 바꾸어 말하면 작업기억력이 학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보들을 잠시 보유하면서 그것들을 처리하려면 머릿속의 작업 공간이 필요하고 그 작업공간이 충분히 확보되어야 정보들을 잘 처리할수 있다. 이를 작업기억 용량이라고 하는데 과목 중 국어, 수학, 과학 점수가 낮은 학습자의 작업기억용량이 낮은 것으로 밝혀졌다.(Catherecole&Alloway, 2008) 한정된 크기의 상자를 상상해보자. 상자의 한쪽엔 물건들이 쌓여 있으며 입구에선 물건들이 끊임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있다. 효과적으로 물건을 넣는 방법을 개발하여 물건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공간을 줄인다면 한번에 더 많은 물건을 넣었다 뺐다 할수 있으며, 쌓여 있는 물건의 수도 늘어날 것이다. 이처럼 과제의 반복된 수행은 정보처리에 필요한 작업 공간을 줄어들게 만들어 더 효과적으로 정보를 처리할수 있다. 반대로 고양이 한 마리가 상자를 돌아다니고 있다면? 물건을 넣었다 빼는것, 쌓아두는것에 방해가 될 것이다. 고양이를 학습과 관련없는, 흔히 말하는 '딴생각'에 비유를 해보았다. 작업 공간을 고양이에게 내어주게 되면 수업중 처리해야할 중요한 정보를 위한 공간이 좁아지게 되고 당연히 정보처리를 효과적으로 할수 없게 된다.
이 개념을 알고 부진학생들을 이해하는데 큰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았지만 학생들을 관찰하며 의문이 하나 더 생겼다. 작업기억력이 떨어지는 아이는 거의 예외 없이 '주의력' 또한 약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내가 방금 한 수업내용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작업기억력 때문인지 주의력 때문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뇌에 관련된 책을 몇권 더 읽고서 의문이 풀렸다.
1. 의문을 품은 명제 자체가 틀렸다. 작업기억력이 낮은거야, 주의력이 낮은거야? 라는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뇌는 그렇게 분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의 묘사에 따르면 뇌는 재료를 넣고 저어서 만드는 수프같은것이 아니다. (뇌는 달리고 싶다: 안데르스 한센 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네트워킹이 있다. 뇌의 각 부위가 얼마나 활성화되어있는지, 각 부위끼리의 연결이 강한지 약한지가 모두 우리의 인지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 고도로 복잡한 뇌의 네트워킹, 기타 그 사람의 정서 및 습관, 그 수업의 흥미도, 기타 등등이 조합된 결과로 그 순간 각자의 작업기억력과 주의력이 정해질 것이다.
2. 작업기억력과 주의력은 뇌의 같은 부위에서 활성화된다. 그 부위는 바로 '이마엽'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우리의 인지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마엽의 크기나 활성도가 낮은 학생은 작업기억력뿐 아니라 주의력도 떨어질것이고 반대로 이마엽이 잘 활성화되어 있는 학생은 작업기억력도, 주의력도 우수할 것이다
A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몇차례 왈칵 눈물을 쏟는 A의 모습으로 보아 나는 A가 불안이 높고, 그로 인한 생각(혹은 걱정)을 하느라 이 공간을 많이 뺏기고 있는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불안을 낮추는 것이 우선일테다. 먼저, 자리배치에 신경을 썼다. A 주위나 같은 모둠에 공격적인 친구들이 있지 않도록 조절하였다. 그 다음 편안한 분위기에서 성취감을 느낄수 있는 임무를 주었다. 학습에 도움이 필요한 친구와 짝을 지어 방과후에 함께 공부하도록 하였다.(A의 어머님께 동의를 받아 필요한 공부거리를 주 2회 가져오고 있다) 온순한 A는 고맙게도 나를 잘 따라주었고 학년이 끝나가는 지금은 불안이 많이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오랫동안 작업기억과 주의력에 관한 글을 쓰려고 생각해왔다. 쓰려다가도 머릿속에서 잘 전개가 되지 않아 미뤄두었던 것이다. 그간 글을 쓰기 어려웠던 것처럼 작업기억력이라는건 내가 연수 하나를 듣고 몇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다 파악할수 있을 만만한 개념이 아닐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수업중 미숙한 학생의 원인을 작업기억력 용량이 작은 것과 연결지어 설명했는데 심리학 전공도 아니고 소아정신과 의사도 아닌 내가 A를 작업기억용량 부족에, 불안이라고 진단한 것이 오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생소한 개념을 아는 것은 분명 내게 도움이 되었다. 딴 생각이 어떻게 학습을 방해하는지, 반복훈련이 왜 중요한지, 미취학때 책을 많이 읽은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여 교과서를 접했을때 더 적은 용량을 들여 처리할수 있겠다든지 하는 아이디어를 새롭게 얻을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요즘 만나는 어린이들의 작업기억력과 주의력이 많이 낮아져 있는것을 매일같이 실감한다. 정보가 처리되어야 할 공간에 다른게 많이 들어있을까? 아니면 상자 자체가 작아졌나. 내가 큰 흐름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가 만나는 아이들만은, 내 방식대로 도와줘야지 생각한다. 내가 아는게 뭐... 신체활동이나 대화나 독서 이런것들 뿐이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