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유전자 없는 엄마의 덕후 아들 육아기
여섯살, 행복한 덕후 되기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난 진짜 늙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아이의 핑크빛 뺨과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볼 때도 아니요, 하늘이 흐릴때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낄 때도 아니다. 더 큰 충격은 아이의 눈빛에 비해 나의 그것이 빛을 잃어도 한참 잃은 것을 깨달을 때 온다. 아이들은 어쩜 세상 모든게 다 신기할까?내게 구급차는 소음일 뿐이고 커다란 중장비 차는 운전을 방해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것들을 경탄과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는 아들을 봤을때의 느낌이란 마치 일반인이 덕후를 보는 느낌과 같았달까? 딱히 좋아하는 연예인도 없는데다 드라마에도 푹 빠져보지 못했던, 덕후dna가 없는 내가 매번 어딘가에 푹 빠져있는 아들을 키우며 알게 된 것은 이거였다.
'덕후가 되는 것은 참 행복한거구나!'
아이의 첫번째 덕질 대상은 쓰레기장이었다. 아이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 달리 할 일이 없어 단지 산책을 자주 나갔는데 그때 재활용 쓰레기를 들어올리는 집게차에 빠져서는 행복한 쓰레기장 덕후가 되었다. 덩달아 나도 분리수거장에서 일하는 아저씨들과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고 그분들께 '이 폐기물 버리고 도망간 사람 보았느냐'는 질문도 받을 정도로 나와 아이는 쓰레기장에 자주 갔고 꽤 오래 머물렀다. 아이가 행복해 하는데다 눈빛이 빛나는 것을 보니 그곳에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중장비 덕질 시기엔 교외에서 놀다 들어오는 고속도로 곁에 중장비가 여러대 주차되어있는 한 사무실에 들르기도 했다. 이 시기엔 중장비를 주제로 한 영어 원서를 많이 들이밀어보았는데 그 덕에 작년 아이의 원어민 담임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어떻게 공사장 관련된 어휘를 다 아느냐고 코멘트를 남기시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 알게 된 건, 중장비 덕후 아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었다. 각종 책과 장난감들의 종류로 짐작하건대 그것들을 소비하는 탄탄한 수요층이 있다는 것 아닌가!) 또 공룡 덕질 시기도 있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공룡이름을 읊고 공룡 책을 한글책이든 영어책이든 종이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보았다. 그무렵 소중한 여름휴가를 나의 취향은 곱게 접어둔 채 아이 맞춤으로 고성 공룡박물관으로 가기도 했다. 그 후 이순신과 거북선 시기를 거쳐, 오케스트라 덕질 시기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오케스트라 사운드북이 발단이 되었는데 이땐 책과 더불어 유튜브로 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의 공연 실황을 많이 보여주고 어린이를 위한 클래식 공연도 보러 갔다. 어느 날엔 자기는 나중에 bbc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주자가 될거라며 꼭 공연보러 영국에 오라고 내게 당부하기도 했다. 아이의 작은 마음이 행복으로 부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아이가 빠져 있는 것은, 단연 야구다. 최근에 친정 가족들과 야구장에 갔는데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모래놀이만 하다 올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그날 이후 야구에 푹 빠졌다. 요즘엔 하루 종일 선수들의 응원가를 부르거나 폭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구 놀이를 하러 나가자고 조른다. 다행히 야구는 나와 남편의 관심사이기도 하기에 우리는 아이와 함께 야구를 보며 규칙을 열심히 설명하고 우타자는 왜 좌투수에게 약한지 같은것도 즐겁게 얘기한다.
이렇듯 아이는 많은 관심사를 갈아치웠지만, 많은 부모의 바람처럼 영어나 수학, 혹은 과학 덕질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런 학습적인 주제가 아니더라도 아이가 뭔가에 푹 빠져있을때 그것에 깊이 파고들고 또 넓게 확장하기도 하는 과정은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시간과 일요일에는 쓰레기차가 오지 않으니 월요일에 많이 쌓인다는 것, 분리배출을 한다는 것, 음식쓰레기와 일반쓰레기,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가 각각 다르다는 것 등을 아직 어설픈 입과 손으로 열심히 표현하던 시절이 있었다. 또 발음도 어려운 공룡 이름을 외우다가 자연스레 화석으로 관심이 옮겨가기는 네살배기가 우등생같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의 아이는 천재가 아니었고 단지 좋아하는 것에서만 특별한 능력을 발휘했을 뿐이다. 야구 규칙을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익혀가는 아이와 수학 문제집을 겨우 두장 풀면서도 몸을 배배 꼬는 아이가 과연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문이다.
덕후 dna가 없는 나는 아들이 덕후가 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관련된 책을 사거나 빌리고 관심이 갈만한 장소를 방문하는 등 아이의 관심사에 대한 탐구가 깊어지고 때론 확장되게 도왔다. 더운 여름에도 냄새나는 쓰레기장을 전전했으며 부산 여행을 가서는 과학관에서 몇 시간 동안 고고학자 옷을 입고 모래를 파고 있던 아드님 덕분에 기장 바다를 바라보며 우아하게 브런치를 먹을 계획을 파기해야 했다. 이런 희생이 필연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포인트는 이런 건 유치원 선생님도, 학교 선생님도, 학원 선생님도 해줄수 없는 일이며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엄마가(또는 주양육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관심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그것이 깊어지고 넓어지게 도와주는 것 말이다.
며칠 전, 유퀴즈에 출연한 소아정신과 교수님의 인터뷰를 보았다. 4-7세 공부정서에 관련된 짧은 인터뷰였는데 대략 요약하자면 이렇다.
"4-7세는 전두엽이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시기이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네살짜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탐구하기도 해요. 부모는 아이들이 이런 것을 마음껏 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 말씀이 내가 평소 나의 생각과 같아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동네 도서관엘 간다. 지난 번 갔을 때는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고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난 후라 제주도, 태풍 관련 책을 빌렸다. 그 책들을 반납하고 오늘은 야구 관련 책들을 빌렸다. 아빠와 야구장에 간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 야구의 제반 규칙을 알려주는 지식책 두 권이다. 그리고 어린이용 야구공을 역시 어린이용 배트를 들고 있는 아이에게 족히 한 100개쯤 던져 줬다. 오늘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 경기에 져서 아쉽지만 아이가 야구에 푹 빠진 하루를 보내고 남편과 나도 행복한 야구 덕후가 되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