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칠된 붉은색

by Imgettingbetter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를 피우러 가겠다는 신호였다. 여자는 아버지가 사라지자마자 핸드백을 챙겨 들었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날카로웠다. 여자의 뒷모습이 화장실 쪽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았다. 식어버린 껍데기와 빈 소주병, 그리고 여자가 남긴 물컵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환풍기는 여전히 웅웅거리며 돌아갔지만, 매캐한 연기는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나는 젓가락으로 타버린 껍데기를 쿡 찔러보았다. 딱딱했다.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완벽한 거절의 형태였다.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바닥은 미끄러웠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신발 밑창이 바닥에 쩍,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그 끈적한 감각을 느끼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을 열자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 왔다. 식당의 덥고 기름진 공기와는 다른, 인공적인 레몬 향과 물비린내가 섞인 냄새였다. 타일은 차가웠고, 형광등은 수명을 다해가는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그때 안쪽 칸에서 소리가 들렸다. 끅, 끅. 무엇을 게워내려 애쓰는,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마른 구역질 소리였다. 위장이 뒤틀려 식도를 쥐어짜는 소리가 타일 벽을 타고 울렸다. 변기를 붙잡고 있을 여자의 손이, 하얗게 질린 그 손가락 마디마디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뱉어낼 것이라고는 조금 전 억지로 삼킨 물과 공포뿐일 텐데, 여자의 몸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세면대 앞에 섰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아.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렸다. 물소리가 안쪽 칸의 구역질 소리를 덮었다. 나는 물을 잠그지 않고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보고 있었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난 내 얼굴에도 여자가 가리켰던 그 선이 있었다. 인디언 보조개. 엄마가 남긴 흔적.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누군가의 대용품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의 바코드처럼 보였다.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여자였다. 여자는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다가왔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마주쳤다. 여자의 얼굴은 젖어 있었다. 입가에 묻은 물기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억지로 덧칠했던 붉은 립스틱은 지워져 입술 본연의 창백한 색이 드러나 있었다. 여자는 나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고 지친 눈빛으로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틀어 입을 헹궜다. 퉤. 뱉어낸 물이 붉게 섞여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여자는 젖은 손으로 입가를 훔쳤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나와 눈을 맞췄다. 여자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함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묻고 싶었던 말들을 삼켰다. 괜찮으세요? 진짜 하실 거예요? 아빠가 누굴 보고 있는지 아시잖아요. 그 모든 말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젖은 손을 코트 자락에 문질러 닦았다. 거친 원단에 손바닥이 스치는 소리가 삭, 삭 났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것이 나를 향한 말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엷게 웃었다. 왼쪽 볼에 다시 그 선이 그어졌다. 엄마와 똑같은 위치, 똑같은 깊이의 주름. 그 웃음은 체념이라기보다는 견디는 자의 습관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껍데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용물이 없는 껍데기, 죽은 사람의 형상을 뒤집어쓴 대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삼키고 있었다. 씹히지 않는 돌을 삼키듯.

여자는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냈다. 뚜껑을 여는 소리가 달칵, 하고 났다. 여자는 거울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지워진 입술 위에 다시 붉은색을 칠했다. 덧칠하고, 또 덧칠했다. 입술은 다시 피를 머금은 듯 붉어졌지만, 그 아래 감춰진 창백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립스틱 뚜껑을 닫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장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며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거울 속에 홀로 남은 내 얼굴 위로 여자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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