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오공주맘에서 육 남매맘으로 이름을 바꿔준 막내아들 승윤이가 있다.
아이가 자랄수록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라고 말할 줄 알고, 잘 웃고, 잘 울고, 잘 크는데 뭐가 걱정이냐며 주변에서 다들 말했지만 엄마인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유난 떨지 말고 지켜보자.”
“아들은 좀 성장이 늦더라.”
주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아이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말도 너무 늦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요란한 말을 하며 실실거리며 웃거나 콩콩 뛰거나 알파벳이나 퍼즐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안돼, 제발 그것만은 하지 마!’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자폐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은 했다. 결국 발달지연에서 발달장애를 받아들여야 했다.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육 남매가 서로 함께 놀다가 첫째부터 아래 순서대로 막내 보기를 떠넘기던 날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집을 나간 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막내가 없어진 걸 알게 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아이를 찾아 나섰다. 그나마 엄마 핸드폰을 들고 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를 걸면 툭 툭 끊어지는 신호에 이번엔 유괴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 와중에 우리는 큰아이 작은아이 서로서로 팀을 정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누가 시킨 것도, 지휘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동생을 찾겠다는 믿음으로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찾았어? 못 찾았어?”
“승윤아~~ 승윤아~~”
해가 져서 깜깜한 대다 비까지 오는 얄미운 밤에 승윤이가 건강하게만 돌아오면 뭐든 다 해줄 거라는 믿음 하나로 대답 없는 메아리만 울려 퍼지는 악몽 같은 밤을 맞았다. 내 마음은 엄청 소란한데 해맑게 웃는 그 아이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아이가 미웠다. 내 불편한 마음이 나쁜 마음을 만들어냈다. 사실 승윤이를 낳고 이상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생각에 죽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열두 번이나 들었었다.
‘승윤이가 없었다면 훨씬 행복하지 않았을까? 매번 이렇게 어이없는 일로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가족들끼리 다툼도 덜 했을 텐데….’ 그런데 막상 내가 생각했던 데로 아이가 사라지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가 나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무서워할 필요 없어, 승윤아. 늘 엄마는 널 보고 있을 테니까. 길이 막혀 힘들면 고개를 들어보렴.’
‘네 잘못이 아니야. 엄마 잘못도 아니야. 우리 함께 행복해질 거야. 제발 제발….’
엄마에게 오는 길을 노란색으로 칠해서 실컷 놀다가 노란 길만 따라오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진짜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간절함이 통했던 것일까? 저 멀리서 빛이 보였다. 승윤이가 집과는 한참 떨어진 논 한가운데에서 첨벙첨벙 뛰어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더럽고 무서워서 엄두도 못 냈을 텐데, 그때 우리 가족 모두는 신발이고 뭐고 모두 벗어던지고 꽁꽁 껴안았다. 그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미로 같은 길에서 노란색으로 연결된 길. 그 길은 아이의 인생길에 걸림돌 없이 헤매지 않고 잘 찾아올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의 길이다. 아이가 안전하게 자라길 바라며 환하게 빛을 비춰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지만 등대지기처럼 방향을 잡아주는 빛이 되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아이가 논에서 첨벙첨벙 신나게 놀다가도 언제든지 노란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아니길 바랐지만 아이는 결국 자폐라는 장애 진단을 받았다. 그때 알았다. “장애”는 누가 주는 걸 덥석 받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인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장애인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승윤이의 장애등록을 결심하면서 아이 생각만 하는 것보다 내 생각도 많이 해 보았다.
‘나 괜찮을까? 장애등록을 하면 낙인찍히는 건 아닐까? 남들은 우리 가족을 어떻게 생각할까?’
내 아이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 내가 떳떳하게 그 어떤 엄마들보다도 씩씩할 수 있을지 오만가지 걱정이 들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든 말든 자기 앞길이 어찌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실실거리는 승윤이가 얄미웠지만, 나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승윤이를 믿어 보기로 했다.
사실 다섯 딸들은 너무나 예쁘고 건강했다. 더욱이 또래들보다 훨씬 잘해주었기 때문에 승윤이에게 장애가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다 보니 내 아이가 특별한 아이라는 걸 알고 난 후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건지,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늘 선택의 상황이 도사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어린이집 졸업발표회를 앞두고 이런 질문을 받았다.
“승윤이는 발표회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까지 다섯 딸들은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났기에 모두의 부러움을 샀었다. 그런데 지금은 발표회를 할지 말지, 선택해야 했다. 남편은 아이도 힘들고, 선생님도 힘들고, 나도 상처받을 거니 이번 발표회는 참여하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난 그 어떤 것도 괜찮다며 용기 내보고 싶었다. 내 용기 하나면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욕심이자 이기적인 마음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 아이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문제없이 잘 지내려면 내 욕심만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가족회의를 거쳐 다수결로 승윤이는 발표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이의 잘못도 아니고, 엄마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조금 다를 뿐이다. 아이가 조그만 손에 꽉 쥐고 가지고 온 새로운 세상을 나 또한 함께 가보기로 했다.
얼마 전에 장애인 카드와 장애인 차량 스티커를 받았다. 처음엔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 스티커를 차에 붙였다 뗐다 하며 다녔었다. 아이를 태울 땐 필요하니 붙이고, 아이가 없을 땐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스티커를 뗐다. 아직도 갈팡질팡하며 적응 중인 나를 만난다.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멀리 있는 아무도 모르는 학교로 보낼까? 너희들은 어때? 승윤이 신경 쓰이니?”
딸들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왜? 승윤이가 어디가 어때서? 잘생기기만 했고만.”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꽁꽁 숨기고 싶었던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장애인 가족.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이제는 장애인 주차구역에 눈치 보지 않고 차를 주차한다. 덕분에 주차하는 일이 많이 편해졌다. 이런 일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우리는 살면서 밝은 길로만 걷지 않는다. 밝았던 길이 어두워지기도 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힘을 내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걸 믿는다. 그것이 종교의 힘이건 부모님의 응원이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건,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헤쳐 나올 수 있다.
승윤이가 어두운 곳에서 밝게 빛을 비춰주어 우리가 찾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린 똘똘 뭉쳐진 가족의 힘으로 그 어떤 힘든 일들도 이겨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매일 외치는 말 매일매일기념일로다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랑하며 말이다. 그래, 이 세상에서 제일 어두울 것 같은 아이 승윤이 네가 바로 우리 집 등대였어. 이 세상 제일 반짝반짝 빛나는. 그렇게 네 빛을 비추며 우리 오늘도 선물처럼 잘 풀어보자~!! 우린 오늘도 기념일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