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르노르망 Nov 10. 2023

산책하다 산 책

열세 번째 산책로  - 『길 위의 철학자』


열세 번째 산책로 - 『길 위의 철학자』 



 한 동안 책을 읽을 수 없었기에 나는 당분간 중고 서점 방향으로 산책을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그러져 보이는 활자를 마주하고 있노라니 우울함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독서에 대한 의욕을 거의 상실할 지경에 이르렀고, 정 책이 읽고 싶을 때면 잠시 룸메이트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네 번째 산책로에 등장했던 『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의 저자 조 퀴넌은 오디오 북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고 나 역시 그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전적으로 그에게 동감했었지만, 정작 시력에 타격을 입고 나서부터는 오디오 북의 존재에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오디오 북을 사서 듣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디오 북 성우들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룸메이트의 목소리를 통해 – 게다가 룸메이트는 자주 발음상의 오타를 창출하곤 했기에 – 궁금했던 책의 내용을 동냥 밥 마냥 집어삼켰다. 


그러나 눈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오디오 북은 얼마나 귀중한 매체인가! 조 퀴넌 식의 표현대로 ‘오븐에 구워진 스파게티를 귀에 꽂는 기분’이 들던, 책 읽는 성우가 ‘나와 책 사이에 끼어드는 느낌’이 들던 말던, 어쨌든 누구의 도움 없이도 책의 내용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은가. 아마 조 퀴넌도 나와 같은 상황에 봉착했다면 백이면 백 오디오 북을 달리 보게 될 것이다. 그 역시 책을 영영 놓아버리는 선택은 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책을 직접 읽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시기는 어떻게 보면 책 보다 산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간 중고 서점을 주 목적지로 거의 같은 산책로를 선택했던 나는 미처 돌아보지 않았던 동네를 여기저기 걸었다. 


걷다 지치면 쉬어가고, 나무와 풀들을 모처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하늘의 모습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카페에서도 일하지 않고 차만 마셨다. 경치가 좋은 공원에서 운동 기구로 운동에 집중하는가 하면, 동네 들 고양이들을 쫓아다니며 함께 놀기도 했다. 틈이 날 때마다 눈을 감고 명상했으며, 영화나 TV를 보는 대신 음악을 들었다. 


본의 아니게 책을 내려놓아야 했지만, 그 덕분에 몸의 움직임은 활발해졌고, 비단 눈만이 아닌 신체의 전 부위가 점차 활성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보고 읽고 쓰기만 하는 통에, 정작 다른 것들을 많이 놓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읽고 쓰는 행위는 삶의 사사로운 일들을 포착해 내고 자아를 성찰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또한 과한 집착으로 이어질 때는 도리어 진정한 삶을 놓쳐 버리게 하는 면이 있다는 걸 나는 이 시기를 통해 깨달았다. 


나는 그간 너무 많이 보아왔고, 너무 많이 읽어왔고, 너무 많은 것을 기록하느라 소중한 감각을 손상시켜 버린지도 모른다. 눈을 감고 그간의 삶을 반추했다. 그간 내가 집착했던 것들과, 내가 도외시했던 것들, 항상 갖고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내 것은 아닌 것들을. 신체의 적신호에 무감했던 나를. 앞으로 불완전한 눈과 함께 헤쳐 가야 할 일들을. 그리고 동시에 미리 포기해 두어야 할 일들에 이르기까지. 


안구 주사를 맞은 후 얼마 동안은, 나처럼 주사를 맞은 환우들 중 각종 부작용을 호소하는 이들의 기사를 흘끔거리며,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까 봐 지레 걱정을 하곤 했었다. 안타까웠던 건 주사를 맞고 드러나는 각자의 증상들이 사실상 전부 다르기 때문에, 내 증상의 경중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의사 선생님께 호소를 해도, 그들 역시 고개만 갸웃할 뿐 적절한 해결책을 주지는 못했다. 망막의 부어오른 정도가 나아졌으니, 그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안구 주사 투여 후, 나에게는 밤마다 기이한 증상이 나타나곤 했다. 매일 밤 자기 직전, 귀에서 ‘탕!’ 하고 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는 반드시 세 번 내지 네 번이 들려야만 그쳤기 때문에, 나는 잠들기 전 항상 그 횟수를 세어야 했다. 나중에는 내가 그 소리를 정말 다 들은 것인지, 혹은 잠을 자기 위해 억지로 횟수를 채운 것인지조차 구분이 가질 않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귓가의 총소리는 분명 안구 주사 이후에 도래한 현상인 만큼, 그로 인한 부작용이라는 생각만은 떨칠 길이 없었다.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점점 두려워졌다. 총소리에 대한 강박이 나를 올아 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주 오랜만에, 비로소 나는 자주 가던 중고 서점으로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불완전한 상태이긴 하지만, 마음먹고 책을 읽자면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언제까지 내 눈을 무료한 상태로 둘 수만은 없었다. 다행히 안구 주사를 맞은 후 부종이 줄어들어, 중심 암점은 많이 흐려졌고, 사물들도 이전보단 덜 구부러져 보였다. 문제는 시야 결손 증상이 아직 남아있어, 직선과 글자가 구부러져 보이고 연결이 끊겨 보이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계속 나를 괴롭히는 총소리 환청도 큰 문제였다. 


그런데 모처럼 들어선 중고 서점에서, 마침 한 작가가 강연회를 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고르는 척하며 강연회장 근처를 서성였다. 순간, 귀가 솔깃해졌다. 그 작가는 바로 ‘환청’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쓴 책의 제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작가가 설명하던 책의 내용은 주로 우울증 환자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환청 증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 역시 그러한 환청을 경험했으며, 마침내 극복해 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우울증 환자들이 주로 듣게 되는 환청이란, 타인들이 자신에 대해 비판하거나 험담을 하는 것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작가는 설명했다. 비록 동일한 종류의 환청을 아닐지라도, 어쩌면 내가 듣고 있는 총소리 환청 역시 작가가 극복한 방식으로 극복될 수도 있으리란 희망이 솟았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작가는 말했다. 


“그럴 때는 절대 그 소리에 휘말리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런 태도가 중요하거든요. 저 역시 그런 식으로 환청을 극복했어요. 그러는 연습을 하니 어느 때부터인지 거짓말처럼 환청이 들리지 않더라고요.” 


나는 이 결정적인 해결책을 머릿속에 꼭꼭 담아두고, 그때서야 여유롭게 주변의 서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환청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니!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책 제목도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약력을 읽던 중 강연회에서 만난 그 작가의 말들만큼이나, 에릭 호퍼의 유년기에 대한 설명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에릭 호퍼는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독서와 사색으로 자신만의 사상을 일군 미국의 사회 철학자이다. 그는 영어와 독일어로 된 다수의 책을 소장하고 있던 아버지 덕택에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영어와 독일어를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일곱 살 때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시력을 잃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자신에게 처음으로 베토벤 음악을 들려주었던, 그리고 책을 사랑했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러던 중 거짓말처럼, 그는 열다섯의 나이에 갑작스레 시력을 되찾는다. 


현대의 과학으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에릭 호퍼는 이를 일시적인 호전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언제 다시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마치 폭식하듯 책을 탐독했다. 그는 체계적인 정식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뒤늦게 되찾은 시력 덕택에 많은 책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것이 그가 ‘길 위의 철학자’로 불리게 된 계기이다. 


더구나 호퍼집안 사람들이 대부분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자신 역시 오래 살 지 못하고 죽으리라 생각했다. 미리감치 삶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그가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택한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로서의 삶과 사상가로서의 삶을 모두 경험했던 그의 인생에는 언제 다시 다가올지 모르는 실명에 대한 공포와, 가족 내력으로 인한 죽음에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에릭 호퍼의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한 때 자살을 기도할 만큼 고단했던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한 작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그에 대한 존경심을 북돋워주었다. 당시의 나에게 그만한 희망의 경종이 또 어디 있으랴. 특히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잃었던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니! 


총소리 환청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잃었던 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기적의 가능성. 발길을 끊었던 중고 서점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내가 만난 이 두 가지 우연은, 내가 다시금 책을 읽고, 환청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왔다. 당연히 나는 에릭 호퍼의 『길 위의 철학자』를 선택해 집으로 돌아왔다. 나 역시 언제까지 책을 읽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하게나마 책을 읽을 수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호퍼처럼 책을 읽어야 했다. 


이 날, 의외의 수확들로 가슴이 충만해진 나는, 에릭 호퍼의 책과 더불어 또 다른 한 권의 책을 골랐다. 그 책의 제목은 『라이팅 클럽』이다. 다음 산책로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책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산책하다 산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