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열한 번째 이유까지를 나열해 보고 나니, 왠지 카톡을 하지 않는 이유들을 필요이상으로 세분화시킨 게 아닌가 싶다. 글을 쓸 때는 각각의 이유가 조금씩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 이유에서는 어째 모든 이유들이 다 같이 만나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나라는 인간의 특성에서 연유한 것임은 분명하고, 여기에는 내가 그간 새로운 매체를 대하는 태도 또한 포함되어 있을 것이기에 마지막 이유로 삼아 본다. 그러다 보니 다소 긴 글이 될 것 같다.
돌아보면 새로운 통신 기기와 매체가 급속한 속도로 등장하고 소멸해 가는 모든 시기들을 경험했다.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 가는 길목에 나의 청춘기가 자리한다.
전화와 편지, 전보가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던 오랜 기간을 거쳐, 새로운 매체들의 성장 속도는 어느새 나의 성장 속도를 훌쩍 앞지르고 있었다. 인간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성장을 멈추도록 설계되어 있는 반면, 어찌 된 게 새로운 매체들은 갈수록 더 빨리, 더 크게 자라난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은 아직 전화였다. 전화로 약속을 잡고, 약속 당일 오전까지 별다른 연락이 없다면 그 약속은 성사된 것이다. 만일 약속 상대가 항상 집에 있는 경우 혹은 직장에 전화가 있는 경우는 약속 직전까지도 취소나 변경이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약속 당일 오전에 일단락된다.
갑작스레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경우가 닥쳤을 때는, 약속 상대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상대가 부재중이라면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전달을 부탁하곤 했다. 약속 전 혹시라도 집이나 회사에 들르게 되면 반드시 약속 취소 사실을 전달해 달라거나, 이 연락을 잘 받았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니(이 어디란 전화기가 구비된 동네 다방일 수도 있고, 공공장소나 다른 사람의 집일 수도 있다) 그쪽으로 연락을 달라고 하는 식으로. 더 이상의 연락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부터는 상대방이 허탕을 칠 수 있음을 감안한 채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약속 장소에 나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던 당사자는 결국 집으로 전화를 할 것이다. 혹시 누구에게서 약속 취소에 관한 연락이 없었느냐고. 다행히 전달이 된다면 덜 기다리는 것이고, 운 없이 그조차 불가능해졌다면 1시간 정도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왔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따라서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고 만나기는 힘들었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반드시 약속을 지켰다. 지금의 인류에게는 이미 가물가물해져 버린 기억이다.
이런 병폐를 줄여보고자 했던 모양인지, 어느 날 ‘삐삐’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했다. 이것은 본래 병원에서 위급 상황에 의사들을 호출하던 용도로 사용하던 기기였는데, 신속함에 대한 인류의 열망이 이를 보급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인류 모두가 응급 환자를 다루는 의사들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삐는 누군가의 연락을 받을 수 있는 기계였다. 하지만 그 기기로 연락을 받은 이에게 바로 연락할 수는 없었다. 삐삐가 울리면 그 연락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찍혀 있는 번호로 확인한 후, 가장 가까운 근처의 공중전화를 찾아야 한다. 삐삐는 그 번호로 연락을 ‘하라는’ 울림이었다.
설령 모르는 번호가 찍히더라도 전화를 해 보아야 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번호를 미처 기억할 수 없는 지인이나 선후배, 아니면 다른 곳에서 내게 급히 연락을 취할지 모를 가족들의 호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직접 통화를 할 수 없는 경우를 위해 자동응답기 녹음 기능이 있어, 연락한 사람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시절 친구들은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삐삐를 구입하며 문명의 이기를 과시하곤 했다. 헤어질 때의 인사말이 “삐삐 쳐!”였을 정도다.(밤에는 그냥 전화를 하면 될 텐데도)
이들 중 삐삐를 갖지 않은 이는 나밖에 없었다. 내가 삐삐를 갖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기기가 전혀 편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받은 즉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기기라면 또 모를까.(어쩌면 지금의 휴대폰과 같은 것이 머지않아 도래하리란 걸 예측했던 것일까) 연락을 받은 사람이 삐삐를 친 사람에게 일부러 공중전화를 찾아가며 연락을 하는 이 방식은 내게 있어 전혀 효율적이라 여겨지지 않았고, 뭔가 원시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친구들과 길을 걸어가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삐삐의 울림이 들리면 함께 근처의 공중전화를 찾아야 했고, 드물게 급한 연락이라도 왔을 때는 연락받은 친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여하튼 삐삐는 침착한 만남에 방해가 되었다. 이 기기는 그야말로 ‘말괄량이’였다.
나로서는 삐삐를 쳤는데 왜 연락을 안 했느냐거나 하는 채근도 듣기 싫고, 사실 그때까지는 얼마 살지 않은 인생이었지만 인생을 통틀어 삐삐를 칠 만큼의 위급상황이란 좀체로 일어나지 않으리란 게 내 생각이었다. 또한 나는 집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기에 하루 중 집을 떠나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급한 연락이라 해도 나의 생활 반경 안에서는 다 닿기 마련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삐삐를 갖고 있지 않아 연락하기에 답답하다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그들이 모두 삐삐를 착용하고 있었던 덕분에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예상보다 그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편에서는 그들과 연락하기가 더욱 수월해졌다.
이렇게 내가 삐삐라는 매체를 가볍게 패스한 지 몇 년 후, 드디어 휴대폰이 등장했고 점차 보급화 되기 시작하면서 삐삐는 머지않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내가 첫 휴대폰을 갖게 된 건 1999년, 삼성 애니콜이 그 시작이다. 아직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 기기는 작은 크기의 폴더형으로, 당시로서는 최신형 모델이었다.
사실 나는 지금도 이런 형태의 폴더폰이 나오면 어떨지 상상하곤 한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크기, 폴더로 보호되는 나의 통화내역, 너무 작은 액정이 요즈음의 사람들에겐 많이 불편하게 여겨지겠지만, 짧은 문자를 치기엔 제격이었다. 문자 치기의 재미에 빠져 휴대폰을 가진 이들에게 평상시와 달리 자주 연락하곤 했던 기억도 새롭다.
1999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내가 교체한 휴대폰은 총 3개다. 그러니까 25년 간 지금 쓰고 있는 폰까지 총 4개의 휴대폰을 사용해 본 셈이다. 지금 쓰고 있는 휴대폰은 내게 있어 첫 스마트폰으로, 2018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근 6년이 되었다. 사실 나는 스마트폰 이전에 나의 마지막 2G 폰이었던 LG Cyon 슬라이드 폰과 근 20여 년간 유지해 온 011로 시작되는 전화번호를 바꾸고 싶지 않았었다.
011로 시작되던 번호는 1999년 첫 개통 이후부터 사용해 온, 그냥 내 몸과 같은 번호였고 작고 귀여운 LG 폰은 딱히 사용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 음악 듣기, 메일 확인이 가능하며, 문서도 읽고, 인터넷도 검색할 수 있는 스마트 폰을 쓴 지 6년이 지난 마당이기에 지금 이 폰을 다시 쓰라고 한다면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나는 문서나 메일은 집에 있는 노트북이나 PC로, 사진은 카메라로, 음악은 MP3로 듣고 있었기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LG폰을 쓴 지 근 10여 년가량이 지난 2018년 봄,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폰의 자판이 들떠버렸다. 자판이 들떠 점점 부풀어 오르니 폰을 더 이상 밀어 내려 닫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자판이 뜯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프고 속이 상했지만 더 이상 이 폰을 쓸 수 없겠다 판단한 나는, 이 참에 스마트 폰으로 교체하며 번호도 변경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주변에서 왜 아직도 011 번호를 사용하느냐고 질문받던 그때의 기분이, 꼭 요즈음 왜 카톡을 안 하느냐고 질문받을 때의 느낌과 흡사하다. 누군가는 내게 혹시 통신사에서 보상을 해줄까 해 그러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물론 내가 이 번호를 유지하려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오래 사용한 번호에 대한 남다른 애착 때문이었고, 혹시 나와의 연락이 끊겼거나 갑자기 연락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했다.
011로 시작되는 번호를 왜 유지하는가에 대해 항변하듯(어쩌면 지금처럼) <왜 나는 아직 011을 쓰는가>에 대한 이유를 장문의 글로 혼자 정리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011과 관련된 질문에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고, 실제로 나와 이 번호로 재회가 시작된 인연은 거의 없었기에(누가 20여 년간 감히 같은 번호를 고수하리라 생각하랴), 결국 10여 년을 봉사하다 처참하게 고장 난 LG폰 앞에서, 나는 마음을 바꿨다.
그러고 보니 내가 카톡을 하지 않는 이유가 이 글을 쓰며 더욱 확실해지는 것 같다. ‘신속함에 대한 열망’은 분명 편리한 새 기기를 만들게 해 준 동력이다. 그리고 인류는 결코 이 열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로 인해 우리가 포기해야 할 다른 것들이 생긴다. 그것은 바로 시간과 인간에 대한 너그러움이다. 초고속화되어가고 있는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소외감은 더욱 짙어져 간다. 빠르게 오가는 메시지 속에서 극도의 공허감을 느끼고, 함께 마주 앉아 공통의 관심사를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각종 SNS로부터 멀어지면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도태되리라 우리는 지레 겁을 먹는다. 급기야 아예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통신 수단이라면 휴대폰, 이메일, 문자 메시지 정도만을 사용하고 있는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의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결코 SNS의 활용 여부가 아니다. 인간관계의 결정권은 전적으로 나의 마음에 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카톡을 거부하느냐고? 카톡을 하면서도 마음의 중심만 잡는다면 휘둘리지 않을 텐데 뭐가 그리 두려우냐고?
아마도 마음의 중심이 충분히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중심을 더 두텁게 키운 후에는, 그 어떤 SNS를 활용해도 초지일관하게 될 지도. 누구보다 빨리 대응하면서도 내 시간을 챙길 수 있을지도. 하지만 적어도 현재로서는, 마음의 중심을 키우는 데에 카톡이 방해가 되는 것만은 사실일지도. 어쩌면 이 모든 이유는 기존의 라이프 스타일을 온전히 유지하고 싶다는 지극히 단순한 열망, 그러니까 '신속함과는 정반대의 어떤 열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