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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Dec 26. 2023

별 거 없는 서류 한 장

관내 전보를 위한 내신서를 썼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는 육아휴직 6개월 기간을 빼면 정확히 3년 6개월을 근무했다.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 3월에 부임해서 4년이 훨훨 지나가고 나에게 남은 것은 정말 별 거 없는 서류 딱 한 장뿐이었다. 나의 4년이 담긴 서류에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다.


이 학교로 온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우리 딸이 다니게 될 병설 유치원이 있는 초등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원했고 그동안 육아휴직으로 관내 이동 점수가 많지 않아도 무리 없이 올 수 있었다. 딸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남들은 누릴 수 없는 특권을 누렸다.


아이를 어쩌다가 급식소에서 만날 때 처음엔 울면서 달려왔다. 작은 아이가 큰 급식소 의자에 걸터앉는 모습도 안쓰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 티 나게 인사하지 않고 눈빛으로만 안부를 물었다. 1-2학년 담임을 할 땐 건물이 놀이터, 운동장과 가까워 아이가 친구들과 노는 모습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수업 중에 바깥에서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딸이 보였다. 또래보다 너무 작은 아이는 그네도 못 타고 무서워서 미끄럼틀도 못 타는 바람에 선생님과 시소를 타곤 했다. 그런 아이를 한참 보다가 다시 눈을 돌려 수업을 했다.

따뜻한 손을 잡고 유치원 앞에서 들여보내줄 땐 아쉽다가 그 따뜻한 손을 빨리 잡고 싶어 유치원으로 앞으로 달려가 딸과 만났다. 그렇게 2년을 아이와 특별한 시간을 보냈고 그다음은 둘째 아이 차례였다.


첫째와 두 살 터울의 둘째는 엄마와 손 잡는 것 대신 유치원 가는 짧은 길에서도 달리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  주차장에서 교실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법 없이 어느 날은 방아깨비를 잡고, 어느 날은 계단 오르락 내리기를 반복하며 겨우 겨우 교실로 들어갔다. 퇴근할 때 교실 정리도 못하고 유치원에 혼자 너무 오래 있을까 봐 데리러 가면 시큰둥하게 왜 벌써 왔냐고 핀잔이었다.

엄마보다 선생님이 좋고, 엄마보다 친구가 좋고, 하다 못해 엄마보다 교실에 있는 자석 블록이 좋은 아이였지만 끈끈하고 따뜻한 손으로 그날 만든 만들기는 제일 먼저 뽐냈다. 자기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세세하게 늘어놓는 아이의 입과 눈을 보면서 하루를 잘 보내줘서 다행이었고 그걸 제일 먼저 알려줘서 사랑스러웠다.

점심 먹는 시간대가 달라 급식소에서 만나긴 어려웠지만 간혹 아이가 놀이터에 갈 때 마주치거나 복도에서 마주치면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그것도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서류에 넣을 수많은 가산점 대신 그것들을 택한 것은 나였다.


그래도 4년인데 어떻게 이렇게 쓸 가산점이 하나 없을까 다시 보고 또 봤다.

1학년 담임을 1년 했지만 2021년 경력부터 쓸 수 있는 것이라서 2020년에 했던 것은 의미 없었다.

6학년 담임도 하려고 했지만 4학년 담임이 되었을 땐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 나이 되도록 부장 교사도 한 번 안 했다. 학교에 부장 교사가 없다고, 다음엔 내 차례라 말했던 교감선생님께 아이가 너무 어려서 못하겠다고 둘러 말하지도 않고 직접 말했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대회 나간 것은 겨우 한 번, 그것도 2학기에 조금 거들었을 뿐이라 대회에서 순위권에 오르지 못했을 때도 (2등부터는 지도교사상이 있었지만 3등을 했을 때) 괜찮았다. 정보화 가산점, 한국사 가산점, 영어 가산점 등은 이미 지난번에 써먹었고 그 이후에 다시 시험을 보지도 않았을뿐더러 자격등이 학생 지도에 큰 의미가 없었다.


내가 발로 뻥 차버린 가산점의 기회가 명백히 수치로 보이자 스스로 부끄러웠나 보다.

학교 근무 가산점밖에 없는 작은 그 숫자가 내 4년의 전부였다.


수업 정말 열심히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모르는 것은 배워서 잘 가르쳐 주려고 했다.

생활 지도 역시 놓치지 않았다. 몰라서 못하는 거지 인성 자체가 나쁜 아이는 아니라며 애써 긍정하며 하루하루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대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도 좋을 거라며 좋은 인생을 살려고 노력했다.

학부모 상담, 민원 잡음 없이 처리했고 나름대로 친절했다.

맡은 업무는 크고 작은 업무든 신속하고 정확하게 진행했다.


어느 한순간도 열심히 하지 않을 때는 없었는데 점수라 이뿐이라면 그래 그걸로 됐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 하나 그런 마음도 들었지만 분명한 건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 어느 때고 쉽지 않았다. 일과 육아 두 개의 역할에서 아슬아슬 균형을 잡으며 가쁜 하루하루였다.


그 시간이 지금 희미해졌다고 해서 그때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앞서 쓴 것처럼 남들은 누리기 힘든 특권을 누렸다. 그렇기에 이 작은 점수를 나만은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 내가 거부하고 안 한 일을 누군가는 열심히 했고 그에 합당한 점수를 받았기를 바란다.

4년 동안 뭘 했길래 이 점수냐고 누가 물을 사람도 없지만 누가 묻는다면 별 큰일 없이 학교 잘 다녀서 그렇다고 말해야겠다.


별 거 없는 서류 한 장에  4년이 담긴다고 생각하니 잠시잠깐 억울했나 보다.  하지만 점수에 모든 시간이 오롯이 담길 수는 없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대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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