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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l 08. 2024

참을 수 없는 부드러움

아들은 잘 때 볼에 무언가 부드러운 것을 부비적거려야 잠이 든다. 냄새를 맡고, 볼로 쓰다듬고, 손으로 조물조물 거리는 행동들. 아깃적부터 시작된 꽤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으레 하는 애착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없어질 행동이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것을 찬찬히 돌이켜보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사진첩을 천천히 넘겨보았다.


돌이 갓 지났을 때는 내복이었다.

조금 지난 후엔 도톰한 수면조끼, 그냥 조끼

그러다가 토끼 인형 뒷다리 - 뒷다리 발바닥이 다 해질 때까지 들고 다니고 귀에 비비거나, 볼에 맨질맨질 온몸에 부비적 비비적거리다가 토끼를 베고 잠이 들었다.


좀 커서 누나랑 같이 쓰는 방에 침대를 들여 넣었고,

취향에 딱 맞는 상어 이불을 세트로 해주니 그 이후에는 토끼 인형은 뒷전이고 상어 베개를 들고 다녔다.

제 몸보다 더 큰 베개를 어딜 가든 들고 다녔다. 어린이집 가는 차 안까지 베개를 들고 갔고, 기어이 어린이집 안에 들고 간 적도 몇 번이다. 위생상 차 안까지는 허용했으나 길거리에 들고 다니는 것은 용납하지 않자 떼를 부린 날도 많았다.

할머니댁, 외할아버지댁, 여행을 가도 뒷자리 자기 카시트에 앉은 후 꼭 머리 옆에 베개를 두었다.

어딜 가든 한 몸처럼 베개를 들고 다니니 외할아버지가 "베개 또 들고 왔냐?" 한소리 해도 전혀 상관하지 않던 녀석이다. 여행 갈 때는 부피가 너무 커서 베갯잇만 들고 간 적도 많다.


그런 베개가 더 이상 손 쓸 수 없을 만큼 낡고 해지더니 기어코 속살을 다 드러내버렸다. 진작에 바느질로 꿰매어줘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떨어진 면적이 넓어졌고 마음먹고 바늘을 들었을 땐 이미 늦었었다.

아이는 같은 베개를 다시 사달라고 요구했지만 같은 디자인의 커버는 세트로만 판매되는 제품이었길래 베개 커버를 사려면 이불 풀세트를 다 사야 했다. 또한 집에 차고 넘치는 베개가 많은데 더 늘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과감히 베개를 끊자고 이야기했고, 다른 베개를 침대에 넣어줬다.

그때까진 아이도 어엿한 초등학생이니 베개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코로나 걸려서 방안에 이주간 유폐됐던




그런데 그 이후 아이의 또 다른 베개가 생겨버렸다.

바로 엄마 베개다.

아이는 잠이 늦게 드는 편이다. 일찍 이불에 누워도 베개를 만지작 거리고, 비비적거리면서 놀다가 잠이 들었다. 그게 내복, 토끼, 상어 베개였을 땐, 귀여웠지만 내가 베개가 되니 참을 수 없이 부드러웠다.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내 팔을 만지작, 종아리 허벅지를 부비적 거린다. 말랑거리고, 매끈한 곳을 찾아 여기저기 만져야 잠이 든다.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잠들 때까지 자기 곁에 있으라고 선포하고 만지작 거리는 아들의 손길이 갈수록 간질거려 참을 수 없어 냅다 그만하라고 소리를 지른 적도 많았다.

다시 베개를 사줘야 하나? 그러기엔 그 아이 침대엔 다양한 공룡과 어류, 파충류들로 한가득이다.

점점 좁아져가는 침대 위에 모로 누운 엄마를, 비몽사몽 잠이 들 때면 아이가 볼로 문질러대는 통에 간지러워 잠이 달아나버린다.


참을 수 없는, 숨길 수 없는, 아니 숨넘어가는 부드러움에 자지러지게 웃으면 가만히 있으라고 호통친다.

다리를 빼고, 허리를 비틀고, 손을 붙잡아도 요리조리 내빼곤 다시 부드러운 다릿살! 하면서 비비적거린다.

어떻게 손쓸 수 없이 불편할 때는 짜증을 팩! 하고 방을 나온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다른 인형들을 잡고 쓰다듬다가 잠이 든다.


아이가 언제까지 그러겠냐 싶어 가만 놔두었더니

언제까지가 지금까지 그러고, 내일도 그럴 것 같아 오늘 저녁 밤에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녀석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나와 글을 쓴다.


글을 쓰다 보니 우리 아들만 이상한가 싶어 다시 핸드폰 사진첩을 보니 딸은 이맘때 손가락을 빨았었고, 조카들은 커다란 담요를 둘러메고 다녔다. 그리고 그렇게 뭔가를 손에 들고 다니면서 비비적거렸던 시기도 하필 내가 복직하기 위해 수유를 끊었던 돌 직후였다. 미안하게.


말싸움 우리 가족 1등, 떼쓰기 울기까지

삼관왕에 빛나는 아들.

부드러운 베개 없이 잠 못 드는 모습이면 꼭 안아주고 싶어 다가가지만 그러면 숨 막히고 싫다며 손등으로 엄마 팔뚝을 슬금슬금 문질거린다. 참을 수 없는 그 심오한 부드러움 탐닉이 나로 끝나길 내가 아들의 마지막 베개로 남길 바라며, 친구들은 절대 그렇게 만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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