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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May 20. 2022

경직된 인간들은 불쌍해


집안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아침에 라디오에서 들은 나의 아저씨 어른 번째 반복해서 듣고 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참 좋은 노래다.

극 중 박동훈(이선균)이 말하는 대사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나도 경직된 인간일까?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의 살아온 날들이 보이는 때가 있다.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가족들을 위해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 나는 어떤 사람일까?


6월 1일은 지방 선거다.

며칠 전부터 파랗고 빨갛고 노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등굣길에 아이들에게 손을 흔든다.

아이들이 가는 길목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분들이 흰 장갑을 흔들며 아이들의 등교를 격하게 응원해준다.

출퇴근길 이동 인구가 많은 곳, 동네에서 유동인구가 많은 거리, 아파트 횡단보도, 아이들 학교 앞을 모두 이들이 점령해버렸다. 가뜩이나 좁은 길 아이들이 뒤뚱거리면서 가방을 들고 걸어가기에도 좁은 그 길에 커다락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아이들을 위해 손을 흔든다.

그 옆에 있는 어머니들에게는 자그마한 명함을 준다.명함 속에는 시의원, 도의원 하는 분들의 이름과 경력이 빼곡히 적혀있다. 깨알 같은 글씨를 읽다가 포기한다.  


조용히 노래를 듣고 있는데 흥겹고 신나는'노라조'의 노래가 들린다.

(노라조의 사이다는 우리 아이들의 최애곡)
누군가의 선거송이다. 베란다 너머로 들리는 그 소리를 무시하고 싶지만 나의 음악 감상을 방해한다.

선거 운동이 개시되면서 후보자들은 자신들의 선거 운동원들을 생활 곳곳에 침투시키고 선거가 코 앞임을 잊지 않게 해 준다. 엉터리 같은 공약을 아파트 입구에 딱! 걸어놓은 사람도 있다.

무소속 시장 후보인데

세상에 우리 아파트 가격을 100% 인상시켜 준단다.

그런 신의 경지에 이른 분을 여태껏 왜 몰라봤을까?


막 투표권을 가졌을 때는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 참 많아서 좋았다. 쉬는 날이니까.

직장인이 되어서는 뉴스도 간간이 보고 좋아하는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조금은 편향적인 정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는... 필리버스터, 촛불시위, 탄핵. 그런 것들이 이어졌다.

지금 들으면 무시무시한 그 말들이 이제는 공공연히 쓰이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가득한 뉴스를 어느샌가 안 보게 되었다.

그때의 그 정치인들.

나의 삶을 더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대체 얼마나 지켜졌을까?


정치는 편 가르기다.

선생님 말씀처럼 모두 모두 잘 지내면 좋겠지만 나와 더 친한 친구가 있듯이

그들도 편을 가르고 내편이 잘못했을 때는 그럴 수 있고 네 편이 잘못했을 때는 세상 제일 분노에 찬 언어로 경멸하는 것은 비단 그들만의 세계일까

경직된 인간들..

그들이 살아온 날을 보여주는 작은 명함 속에

무슨 희망이 있을 거라고 아이의 등굣길에 받은 그 명함을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곰곰이 바라보는 걸까?


얼마 전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

도서관 아래층에 있는 주민센터에서 문화강좌가 있어 주차장은 요즘 자리를 잡기 힘들다.

아무튼 빈자리가 있나 차를 몰고 올라가는데 앞에 까만 승용차 한 대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정차했다.

이윽고 누군가 내렸다.

파란 옷이던가 빨간 옷이던가 숫자가 큼지막히 박힌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 내렸다.

그런데도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인가?

한참을 깜빡이 없이 그렇게 서 있던 자동차 덕분에 나는 오르막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가만히 기다렸다.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기다렸다. 뒤따라오는 차는 한두 대 있었을 뿐이다.

옆으로 가려고 해도 비좁아서 갈 수 없었다.

빵 클락션을 울리려던 순간 차는 서서히 움직였고 나도 뒤따랐다.

그 자동차는 도서관 입구에 주차선이 없는 바로 문 앞에 주차를 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에.

도서관에 가는 주민들, 문화강좌를 들으러 가는 주민들이 오가는 그 문 앞에 주차한 운전자는 빨갛거나 파란 옷을 입고 먼저 내린 사람을 뒤따랐다. 도서관 앞에 있는 운동장에서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뒤따라오던 운전자에게 일말의 양해의 눈빛조차 없었다.
그런 시민 의식을 가진 사람이 시의원, 도의원이 되겠다고 주민들에게 손을 흔든다.


출처 - 다음 뉴스 캡처


좁은 길에서 깜빡이 없이 몇 분을 기다리게 하고

사람들이 오고 가는 출입문 바로 앞에 주차를 하고 선거 행사를 하러 가는 모습에서.. 경멸을 안 느낄 수 있을까?

아이들이 등교하는 그 좁은 길에서 누구를 향해 손을 흔드는지도 모르겠는 그 흰 장갑들을.. 어찌 좋게 볼 수 있을까?


어디선가 읽었던 문구
정치에 무관심하면 내가 가장 경멸하는 사람이 내 권익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최소한 그 상황은 되지 않기 위해 투표는 늘 하고 있지만 갈수록 아리송하다.

땡볕에 나와 허리 굽혀 인사하는 사람들을 보며 순수한 응원은 이제 하기 힘든 경직된 인간이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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