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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Sep 12. 2022

이런 명절

명절 전날, 뭔가 징조가 안 좋았다.

기분 좋게 수업을 마치고 교실 정리한 후 주차장에 갔는데 차 앞 범퍼가 긁혀 있었다.

학교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심하지 않았지만 누가 그랬는지 궁금했다.

블랙박스가 작동하지 않은지 꽤 되었기 때문에 바로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근처에 주차된 차를 찍고 명절 끝난 후 해결해야지 생각하고 짐짓 침착한 듯 집으로 갔다.

집으로 가서 아이들 간식을 챙겨주고 씻고 나오니 아버지에게 전화가 와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아버지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았다. 거칠고 쉰 듯한 목소리. 징조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코로나에 재확진되셨다며 추석에 오지 말라고 하셨다.

걸걸한 아버지 목소리는 지난번 확진되었을 때와 비슷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열은 심하지 않고 증상도 많이 힘들진 않다고 했다.

연속된 두 사건은 명절을 맞이하는 나에게 안그래도 불편한 명절을 더욱 불편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다들 비슷하겠지만 나도 결혼 후 맞는 명절은 그동안 겪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결혼 전에는 명절을 손꼽아 기다리며 긴 연휴를 아까워하며 놀러 갈 생각,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술 마실 생각,

얇지만 쏠쏠한 명절 휴가비로  살까 하는 생각  생각할수록 즐겁고 단순하고 설렜다.


하지만 결혼 후 명절은 내 안에 차오르는 불만으로 시작됐다.

-왜 누가 정한 것도 아닌데 시댁부터 향하는거지?

(남편은 왜 우리 집부터 가자고 하지 않고 나도 우리집부터 가자고 말하지 않을까?)

-결혼 전 제사가 없다던 어머님과 남편의 말은 왜 결혼 후 바로 바뀌어서 차례와 제사를 가져온 거지?

-혹시 늦게 시댁에 도착하면 왜 안절부절못하며 할 일을 찾는 거지?

-왜 차례 지내고 시누이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

-기다리지 않아도 일찍 가는 것이 왜 미안한 거지?

-당일 아침에 남편은 자고 있는데 나는 왜 일찍 일어나야 하지?


이런저런 이해되지 않은 많은 생각들은 둘째치고 먼 거리를 아이를 챙기며 이동해야 했고 선물과 용돈 준비뿐만 아니라 음식 준비와 손님맞이, 청소까지. 평소 하지 않아도 될 일들과 생각이 덤으로 넘쳐났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같으면 피곤해 죽을 판이었다.


사실 이번 추석은 동생 가족이 멕시코에 있어서 좀 더 마음이 쓰이던 차였는데 코로나로 못 가게 되니 정말 혼자 계실 아버지가 마음에 계속 걸렸다.

더군다나 아이들과 남편은 급격하게 선선해진 아침저녁 날씨로 인해 감기에 걸렸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명절 전날 10시에 출발하기로 미리 이야기했었지만 어쩐 일인지 남편은 계속 서둘렀고 바빠 보여서 나도 덩달아 조급해져서 말투도 날카로웠던 것 같다.


오전 10시에 정확히 출발했지만 가는 길목마다 차가 넘쳐나서 평소보다 더뎠고 통영 시장에 들러 문어까지 사가야 했기 때문에 돌아가게 되어 도착 시각은 계속 늦어졌다.  왜 이리 늦냐는 어머님의 타박 섞인 전화를 받은 후부터는 더 마음이 급해졌지만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시댁에 도착했다.


점심 상을 물리고 나서 내가 하는 유일한 차례 음식인 전을 부쳤다. 전은 남편이랑 나, 어머님 모두 같이 하는데 어머님은 진두지휘 및 재료 준비, 나는 재료 준비 및 뒤집기, 남편은 전 팬 위에 놓기 이렇게 분업하여 일사천리로 했다.

꼬치전, 고구마전, 동그랑땡, 부추전, 연근전, 동태전, 깻잎전.

종류가 갈수록 많아지는 것은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재료를 씻고, 썰고, 반죽을 하고, 계란옷을 입히는 것 등 전부 치는 일은 투입된 노동력과 재료에 비례하여 화려했다.

결국 가족들이 먹고 내 아이들이 먹을 것이라서 힘이 들고 더웠지만 흘린 땀방울이 헛되다는 생각은 안 했다. 다른 음식들은 명절 당일 아침에 어머님이 순식간에 하시고 나는 옆에서 거들기만 하기 때문에 전 부치기가 그날 할 일의 전부였다. 남편은 잠깐 하다가 벌초를 하러 나갔고 남은 일은 나와 어머님 둘이 티브이를 보면서 천천히 했다.


-지름은 가로 부서야지(기름은 가장자리에 부워야지)

-나물적은 지름 쪼매만 해라(나물전은 기름 조금만 넣어라)

-고구마는 졉쳐놔야지(고구마전은 겹쳐놔야 서서히 익지)

-빨리 디지바라(빨리 뒤집어라)

-(티비 프로그램을 보면서) 돈이나 주면서 그런 소리 해라 (뜨끔!)


예전에는 빠른 경상도 억양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을 되묻느라 어머님과의 대화가 불편했는데 결혼 9년 차가 되어서야  요즘은 맥락 속에서 대부분 파악하고 있어 되묻는 일은 거의 없고 말도 편하게 하게 되었다.

그렇게 전을 부치고 설거지까지 다 하면 좀 쉴 수 있다.

아이들은 이제 자기들끼리 잘 놀고 티브이도 보면서 평소보다 더 많은 간식을 섭취할 수 있어 자유로웠다.

나는 혼자 방 안으로 들어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면서도 귀는 밖을 향해 레이더 망을 펼쳤다.

누가 언제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누워 있어도 편하지는 않았다. 벌초 갔던 남편과 아버님이 돌아와서 저녁 준비를 했다.

주로 어머님이 준비를 하면 나는 설거지를 하거나 음식을 담고 나르는 정도를 하지만 일단은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부엌 언저리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남편이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이들을 씻기고 감기약을 먹인 후에야 진짜 쉴 수 있었다. 연휴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밤에 깨지도 않고 푹 잤다.

6시에 기가 막히게 일어나 눈곱만 떼고 부엌에 들어갔다. 벌써 나물 몇 가지를 해놓고 음식을 준비하고 계시는 어머님께 인사를 한 후 개수대에 있는 그릇을 씻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차례상에 올리는 과일을 씻어 닦고, 그릇에 음식 담는 정도지만 어머님이 할 일 없다고 들어가라고 할 때까지 그냥 옆에서 서성거리는 게 나의 할 일이었다.

추석날 아침 며느리는 어머님하고 남들 자는 시간에 차례상을 준비하라고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었는데 그냥 알아서 했다.

아버님은 밤을 치고, 남편은 꺼벙하게 일어나서 자기 한 몸 씻고 옷 갈아입으면 나도 방으로 들어와 아이들 깨우고 옷을 입혔다. 큰 아버님이 오실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차례를 지냈다.

오전 10시가 넘어서 아침을 먹고 아버님과 큰 아버님께서 이런 저런 친척들의 근황을 물으며 술잔을 기울이실 때 아침상과 차례상에서 나온 설거지를 했다.


보통 때라면 이렇게 설거지를 마치면 친정에 갈 준비를 한다. 조금 늦게 갈 때는 막내 시누이 가족이 오면 점심 먹고 출발할 때도 있지만 올해는 하루 더 있기로 말하지 않았어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큰아버님께서 가실 때 아버님과 어머님, 남편도 같이 나가서 외갓집에 간다고 했을 때 혼자 방 안에서 누워있었다.

잠이 설핏 들었는가 싶었는데 차가 마당에 들어오는 소리에 금방 깼다. 연달아 막내 시누이 가족이 들어왔다. 때는 마침 점심이었다.


배 부르다고 안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빨리 먹고 치워야 차리는 사람이 편하다!" 라며 나를 보고 말씀하시는 어머님의 말에 나는 부엌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나 스스로  '차리는 사람= 나'를 인정한 것이다.

시댁의 부엌 언저리에서 그냥 부르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순간이었다.


점심상을 차리고 점심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루틴은 남편과 같이 하는 것이었지만 확연히 내가 주, 남편과 시누이는 부로 행동했다. 어머님은 역시나 말로 진두지휘 중이셨다.

모든 먹고 치우는 행위가 끝나자 다시 나는 방 속으로 들어갈 새도 없이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어색해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가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주고 들어왔다. 나도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방문을 꼭 닫아주었다.


또 되풀이되는 시간.

둘째 시누이 가족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면 밖에 나가서 인사를 하고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진 않아도 옆에 앉아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저녁상을 차리고 치우고 하는 일들의 반복이었다.

다만 저녁 때는 보름달을 보러 산책 하기가 추가되었다. 아이들과 같이 어두운 시골길을 한참 걸으니 눈은 어둠에 적응되었다.

아이들은 이제 많이 친해져서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뛰고 걸었다.

같이 나온 어머님과 막내 시누이는 천천히 뒤따라 오고 나는 앞서서 조금 빠르게 걸으며 아이들 뒤를 쫓았다. 여느 해보다 더 크게 뜬다는 달은 아직 구름에 가려서 나올 생각을 안 했다.


걷고 또 걸었다. 걸으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은 두서없었지만 긴장은 서서히 풀렸다.  


갑작스레 친정이 없어진 이번 명절.

멀리 있는 동생 가족과 혼자 있을 아버지를 떠올릴 새 없이 보낸 이틀 동안 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마음으로 아직까지 내 집이라고 느껴지진 않는 시댁에서 할 일이 많지 않았어도 그 시간을 견뎌내는 몸은 잔뜩 움츠렸었다. 누가 눈치를 주지 않아도 스스로 눈치를 보며 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다가 혼자 있는 순간!

달을 보러 산책을 하며 어둠 속에 혼자 있던 그 순간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진 것이다.

이번 명절에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빠와 동생을 못 봐서가 아니라, 시댁에 하루 더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며느리와 엄마, 아내, 딸로서 명절을 보내더라도 나로서 혼자 있을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명절이라면 이런 명절도 괜찮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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