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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an 27. 2023

그냥 쓴다

쓸 이유 없는데 글을 쓰는 이유

알고 있다.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번득이는 아이디어도, 재미있는 말도, 교훈이 넘치는 감동적인 이야기도, 누군가를 성토할 배짱도 없다.

그런 주제는 애초에 생각도 나지 않았다. 혹여 그런 주제가 생각나고 겪었더라도 그것을 머릿속에서 뱅뱅 굴리고 굴리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어서 날아가버렸을 때 마치 처음부터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주제를 찾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쓰고 싶은 걸까

일주일에 한 번, 단 한번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었다.

학기 중엔 바쁘다는 핑계로, 다들 잠든 시간에 겨우 눈을 떠서 몇 줄 적곤 했다. 그렇게 하면 꼭 해야 할 숙제를 한 것처럼 한 주가 편했다. 주제는 제각기 달라도 마음에 턱 걸려서 뱉고 싶은 무언가를 썼다.


지금은 아이들이 잠든 이후 시간이 여유롭다. 마침 발가락도 부러져서 운동도 못 가서 새벽 시간이 텅 비었다. 그토록 바랬던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넘쳐나는데도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바쁘지 않았고 힘들지 않았다.

걱정도 없고 스트레스도 없다.

쓰고 싶은 생각도 주제도 없다.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나는 지금 꼭 써야 할 마음에 걸리는, 막혀 있는 것이 없다. 물론 자질구레한 이런저런 것들이 뻥 뚫린 길 위에 놓인 작은 돌처럼 성가시기는 하다.


예를 들어

보험비 청구를 위해 병원을 다시 가야 하는 것,

다음 주 개학인데 교실 컴퓨터가 안돼서 하루나 이틀 정도 컴퓨터를 못하게 되는 것, 생기부 작성을 이번주까지 되도록 마무리해야 하는 것, 요즘 운동을 못해서 옆구리살이 점점 늘어나는 게 보이는 것, 4주 전 방학 하고 바로 가서 점을 뺐는데 흉터가 다시 점으로 바뀌는 것, 간식을 많이 먹어서 얼굴에 뾰루지가 많이 올라오는 것, 둘째가 부루마블을 시도 때도 없이 하자고 하는 것(쓰다 보니 정말 별 거 아니다)


자동차를 타고 밟고 싶은데 여기저기 놓인 돌 때문에 좀처럼 속도를 낼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천천히 가도 되는 길이라 큰 상관없다. 천천히 가도 되는 길이라서 돌을 밟아 덜컹거리더라도 아프지 않으니까.

그렇다. 나는 지금 글을 쓸 만큼 꼭 써야 할 만한 명분이 없다. 그래서 안 쓰는 것이다. 안 써도 괜찮으니까.


여기에서 생기는 질문은 그럼 지금은 왜 글을 쓴답시고 다시 키보드를 마구 두드리는 걸까?

글쓰기 숙제를 미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쓰기로 한 내가 나한테 준 숙제를 안 해서 그렇다.



책에서 이런 문구를 봤다.

이 말을 하기 두렵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아도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글 안 쓴다고 죽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쓰면 죽을 것 같다. 결핍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서 성장한 내가 대견하지만, 애를 써서 만든 안정적인 삶에서 무슨 글이 나오겠는가. 굳이 글을 쓴다 한들 그 글이 무슨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출처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39쪽 발췌 >




맞다. 내 글은 힘이 없고 재미도 없고 명분도 없다.

나를 해방시켜 주던 새벽에 몰래 쓰는 그 글이 아니라 쓸 이유가 없다. 하지만 부채감만은 어쩔 수 없다.

아무 힘도 없고 의미도 없다고 해서 안 하게 되면 그건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은 싫다.

싫건 좋건 내 글은 나 혼자만 쓸 수 있다.

쓸 이유도 명분도 없다고, 세상을 바꿀 글도, 그럴 가치도 없다고 나까지 외면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그냥 쓴다. 어째 많이 본 결말이다.

내 글은 늘 이렇다.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마지막에 결말까지 낸다.

아무도 너에게 유려한 글솜씨를 기대하지 않아.
뭔가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솔직함이나 재미를 원하겠지. 네가 글로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잖아.
<출처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190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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