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둘째 주 - 겨울에 드러나는 소나무
눈이 내린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낭만적인 하얀 꽃잎 같다. 굳이 첫사랑의 이루어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하늘에서 내리는 이 우아한 떨어짐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받는다. 소나무도 손가락을 벌리듯이 가느다란 초록 솔잎마다 한줄 씩 눈을 올린다. 초록 잎에 핀 하얀 눈꽃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이다.
몇 년 전 겨울 산행을 갔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 해는 유난히 함박눈이 많은 겨울이었다. 많은 소나무들이 허리가 험하게 꺾어져 노란 속살이 드러난 채 초록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야생동물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이렇게 아프게 꺾어놓았을 리는 없다. 자세히 보니 소나무를 이렇게 사정없이 부러뜨려놓은 것은 바로 얼마전 내린 하얀 눈이었다. 가느다란 솔잎 위로 눈의 결정들이 얽히고 설키어 쌓이게 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소나무의 줄기가 우지끈 꺽이고 만 것이다. 다른 나무들처럼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겼더라면 우아한 눈꽃만 피웠을 텐데, 어떻게 소나무는 겨울에도 잎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참사를 맞은 것일까?
소나무는 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북동부지역, 일본 등지에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추운 겨울이라는 시련의 계절을 겪어야만 한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하여 소나무의 잎은 가느다랗지만 단단한 형태를 갖게 되었고 부동액 역할을 하는 기름성분이 많아 얼어붙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소나무는 가을이 되었다고 잎을 떨구지 않는다. 봄에 새순이 나와 겨울에도 강하게 살아남은 잎은 다음해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갈색으로 변해 떨어진다. 어떤 잎은 두 겨울을 살아남아 삼년의 인생을 사는 잎도 있다. 이렇게 시간차를 두고 잎들이 살아가기에 우리는 겨울에도 푸른 잎 소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겨울과 관련된 소나무의 생태적 특징은 열매에서도 볼 수 있다. 소나무의 열매를 솔방울이라고 부르는데 봄에 작은 솔방울처럼 생긴 보라색 암꽃과 수꽃의 노란 꽃가루가 만나도 쉽게 수정이 되지 않는다. 암꽃의 난자는 자신의 문 앞에 수꽃의 정자를 기다리게 한 채 겨울을 난다. 건강 테스트를 하듯이 추운 겨울을 잘 견디어낸 정자만이 이듬해 봄이 되면 받아들여져 비로소 수정이 되고 가을이 되어서야 솔방울은 갈색으로 익는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리고 건강한 종자를 만들기 위해 솔방울로 하여금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하는 것이다. 4∼5월 봄에 꽃이 피어 이듬해 가을 9∼10월 종자를 내보내기까지 약 17개월이 걸린다.
잎도 열매도 긴 시간을 사는 소나무를 보니 자신만의 시계로 사는 삶의 여유가 느껴진다. 빠르게 흘러가는 주변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고 자기 색을 갖고 사는 사람의 느낌이랄까! 그게 결코 쉽지 않을텐데 말이다.
이런 소나무의 모습을 생각하다 보니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라는 그림이다. 그림속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다른 나무 세 그루, 그리고 작은 집이 하나 보인다. 김정희가 유배를 갔을 때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집이 너무 초라하게 대충 그린 거 마냥 있다. 반면에 소나무는 소나무껍질의 조각조각과 거침, 솔잎의 삐침까지 잘 표현되어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그루는 아직도 정체에 대해 논란을 겪고 있다. 한자 백자가 측백나무라고 하는 사람들, 잣나무라고 하는 사람들, 그림을 보며 젊은 소나무라는 사람들, 바닷가에 사는 곰솔이라는 구체적인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아무튼 가장 큰 나무 한 그루는 누가 봐도 소나무인게 틀림없다. 유배를 간 자신에게 전과 다름없이 잘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의 행동에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라는 구절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논어가 쓰여진 중국에서는 송백이라함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가리키므로 글로 봐서는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의미로 봐야한다. 어려운 처지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사람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뜻으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겨울에 푸르른 소나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범함의 가치로 생각되게 되었다.
이렇게 소나무에겐 추운 겨울이 꼭 필요한 통과의례이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지구온난화로 전망되어지는 미래보고서에는 소나무가 언제까지나 우리 민족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지 않는다. 추위에 익숙하고 더위에 약한 소나무, 따듯한 겨울과 봄 가뭄으로 인한 수분부족은 소나무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민국은 더 이상 살기 좋은 서식지가 아닐 수 있다. ‘남산위의 저 소나무’ 애국가의 한 구절이 낯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