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나의 하루에 갇히게 되었다.
일주일 전부터 심장의 두근거림이 잦았다.
설렘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닐 테고, 맑은 하늘에 소나기나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에 돌풍이 부는 그런 긴장감이 도는... 뭔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토요일, 엄마 생일이다.
오래간만에 가족들 모두가 모이는 자리다.
2남 1녀 중에 맏아들만 장가를 갔고, 쉰을 넘은 자식 둘은 아직도 엄마의 근심 걱정거리다.
팔순이 넘은 엄마는 과거 그 시절, 우리 집안의 가장이었다.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게 없다'며 평생을 절약하고 모으는데 온갖 정성을 쏟은 엄마 덕분에 우리 가족은 연탄불을 피우는 한 칸짜리 전세방에서 32평 아파트를 구입해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 억척 엄마가 2년 전 뇌경색 진단을 받고 우뇌의 메인 혈관이 막혀 인지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전조증상이 한 달 이상 충분히 보였음에도 나는 모른 체했다.
"답답하면 병원 가~, 청승 떨지 말고 병원 가면 되잖아"
충치로 이가 아파도 병원비 아깝다고 끓인 기름으로 충치 부분의 이를 지지고(엄마의 민간요법)
반찬가격 아끼겠다고 10킬로가 넘는 재래시장을 걸어 다녔던 엄마를 난 항상 부끄러워했다.
경주, 허풍 많은 집안의 장손으로 컸던 아빠!
젊은 시절부터 한탕주의에 빠져 정상적인 직장 생활은 한 적이 없고, 동네에 사람 좋기로 유명한 한량이었다.
매번 사업을 핑계로 엄마에게 주변에서 돈 빌려오라는 강압과 폭언을 서슴치 않았다
젊은 시절 아빠의 빚보증으로 아빠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일찍 취업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덕분에, 우리 삼 형제는 남들보다 바른 경제관념이 일찍 자리 잡게 되었다.
가족에게는 외식 한번 제대로 시켜준 적 없으면서 본인이 입원한 병동의 간호사들에게 25만 원어치의 치킨을 쏘는 남들에게는 한없이 정이 많고,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놀고 싶은 것들이 여전히 많은 팔십 중반에 아빠는 여전히 한량이다.
오전 11시에 나간 아빠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100통이 넘는 전화, 신호음은 가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빠에게 잠깐 재 전화가 왔다는데 받자마자 끊겼단다.
경로당이며, 아버지가 갈 만한 장소를 다 뒤졌다. 엄마도 뭔가 일이 생긴 게 틀림없다며 걱정이셨다.
경찰서로 뛰어갔다. 추가로 112로는 위치 추적을 부탁했다.
경찰서에서 10분 넘도록 아버지 병세, 평소 우울증이 있었는지, 가족과 왜 떨어져 사는지 취조 아닌 취조 형식의 설명을 하고서야 위치 추적의 동의를 얻을 수가 있었다.(허위신고 시 과태료 1천만 원)
112 직원의 "위치 추적 확인되었습니다."
답과 동시에 오빠 전화가 왔다. "아버지 집에 왔다"
안도감과 동시에 울음이 터져 나와 대성통곡을 했다.
"왜 전화 안 받았데? 뭐 하느라 안 받았데? 어디 갔었데?" 사실 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아빠는 그랬다. 평생을 그리 사셨다. 가족들에게 근심과 걱정을 안겨주고 정작 본인은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 사셨다. 그날도 그랬던 거다.
집에 오자마자 서러움에 울음이 폭발했다. 오빠는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뭐라 한다.
하루의 해프닝인 것을 내 감정이 너무 과하다고~
나는 아직도 엄마가 뇌경색 진단으로 119에 실려간 그날에 내 시간이 멈추어져 있다.
더 일찍 병원에 엄마를 데려가지 않은 내 탓을 하고 있다.
타지에 있는 오빠와 달리 나는 부모님과 30분 거리에 떨어져 살고 있다.
아니다, 사실은 아빠 탓을 하고 있는 거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 엄마를 돌보지 않은 아빠를 미워하고 있다.
평생을 떠 받들려 살면서 나이 들어 배우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책임을 묻고 싶은 거다.
그다음 날 아빠는 병원에 입원하셨다.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등 각종 질환을 갖고 있고 무릎, 허리, 목 뇌신경 협착등으로 여러 번의 수술도 하신 탓에 기력이 많이 쇠해졌단다.
그날, 그냥 그런 날일 수 있었는데 나의 예민함이 일을 키웠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