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지기가 더 어려울 때
‘나는 공부도 못하고 뭐가 될 수 있을까’ 동민은 친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귀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친할머니에게 응석을 부리고 싶어졌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에는 영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자신이었지만 지금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다고 동민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동민이는 지금 수학 기초반도 너무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더 밑에 있는 단계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네 선생님" 동민이는 학원에서 영미에게 보내는 자신에 대한 메시지들이 부정적일수록 영미의 한숨과 함께 자신의 가치가 점점 떨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은 동민에게 유일하게 자신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유일하게 하고 싶은 것도 프로게이머였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면서 그 길이 얼마나 재능이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동민의 실력은 친구들 사이에서조차도 그냥 같이 어울릴 정도의 실력이기 때문이었다. 프로게이머가 되려면 최소한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이 있어야 했다. 동민은 오늘도 영미의 눈을 속여가며 그냥 게임에 몰입했다.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것이 편했다.
영미가 아이들 먹는 것에 많은 정성을 기울인 덕분인지 동민이는 키가 훌쩍 컸다. 영미의 곱상한 얼굴을 닮아 외모가 꽤 괜찮았다. 물론 동민할머니는 외모가 준호를 닮은 것이라고 하지만.. 동희에 대한 영미의 걱정은 그냥 사춘기가 오래가는 걸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동민에 대한 걱정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었다. “언니, 아들 때문에 미치겠어. 도대체 뭐가 될지... 나중에 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까? 학원에서 진도를 못 맞춘다고 더 낮은 단계로 가래.” 영미는 소영에게 하소연을 했다. 소영은 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언니이다. “동민이는 나중에 연예인 시켜도 되지.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뭐라도 될 거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 ” 소영의 위로가 영미에게는 그냥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서 하는 공염불 같은 것으로 느껴졌다.
동민은 영미의 걱정을 눈빛으로 그리고 말로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공부는 정말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 누나 동희도 그렇게 똑똑해 보였지만 현실은 그냥 평범함 그 자체인데 자신이 지금 뭔가를 한다고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인가 싶었다. 동민은 영미가 자신에게 좀 무관심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미의 동민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대학을 갈 수 있느냐이다. 동민은 영미 앞에서는 항상 미달인 상태였다. 반면에 준호는 동희와 동민의 학업성과에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 50이 넘게 살아오면서 준호가 깨달은 것은 고만고만한 학교 성적이 인생에 크게 영향을 안 끼친다는 것이다.
"동민아, 이거 전에 말하던 게임팩이야." 어느 날 준호는 영미에게 혼이 나서 기운이 빠지게 보이는 동민에게 게임팩을 건넸다. 동민은 준호가 준 게임팩을 받고 정말 기분이 좋았다. 영미는 무조건 안 되는 것들을 준호가 해준 것이 의도가 어찌 됐든 간에 동민은 자신의 취향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지금 공부하라고 참고서를 사줘도 모자랄 판에 게임하라고 등을 떠미는 거야? 아이들한테 인기 관리하는 거야?' 영미 입장에서는 반칙을 당한 느낌이었다. 영미가 애써 아이들을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려하면 준호가 그 앞에서 재를 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민은 준호가 어려웠다. 동희도 마찬가지로 준호와 거리감이 있었다. 하루 종일 잔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영미와는 항상 붙어 있어서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편한 느낌이 있는데 준호는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고 주말에도 같이 공유하는 시간이 별로 없어서 동희와 동민은 최근에 일찍 들어오는 준호가 낯설었다.
처음 끊인 김치찌개를 먹고 “맛있어요. 엄마가 끓인 것보다도”동민은 아주 잽싸게 준호에게 립서비스를 했다. 이에 질세라 동희도 극찬을 했다. 영미가 없는 공간의 어색함을 아무 말이라도 내뱉어서 환기시키고 싶은 마음이 두 남매에게 일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