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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맘 Jul 24. 2023

언제 가도 옛 모습 그대로의 고향이 있다면

유년기부터 독일에서 살았던 우리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이 독일이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은 가물가물하고 독일에서 첫 번째로 살았던 동네를 고향이라 생각하는 거에 아쉬움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아이들과 그 동네를 가본다고 해도 예전모습 그대로 있다는 게 위로가 된다.


아주 조그맣지만 늘 저 자리에 있던 피자 가게


우리 가족이 살았던 주택가에는 너무 연로하셔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빼곤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그대로 살고 있고 동네의 모습도 변하지 않았다..


옆집 할머니의 90세 생신 때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들도 축하를 하며 케이크와 커피를 마셨던 날이 기억이 난다.

우리 딸은 바이올린으로 바흐의 곡을 연주하였는데 할머니는 편안한 웃음을 지으셨다.


독일은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엄격하게 소음에 대한 법규가 있다.


조용하게 쉬어야 하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서 매일 집에서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건 사실상 쉽지 않음에도 아무 말없이 이웃들이 배려해 주었다.


심지어 연습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셨다는 말까지도 해주곤 했었는데 그건 우리를 위한 쉽지 않은 따뜻함이었고 항상 고마웠다.


동네에는 너무나 큰 개를 키우는 가정이 몇 집 있었는데 나는 적응이 안 되어서 마주칠 때마다 무서웠던 기억도 있다.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며 간간이 내다보던 창문 너머 이름다운 뷰도 여유를 느끼게 해 주었고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공을 찰 수 있는 놀이터가 있는 것도 아이들을 키우는데 좋은 환경이었다.


집안에서 본 풍경


큰아이는 집에서 자전거를 타고 10여분이면 도착하는 축구장에서 축구를 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아이가  암스테르담으로 대학을 간 후 나는 축구장으로 가는 길을 걸으면서 아이를 많이 그리워했었다.



아이가 축구를 했던 곳


들판이 흔한 독일에서 새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고 곳곳이 산책할 수 있는 거리로 한적함을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삶의 여유도 배웠지만 외로움의 극함도 맛보았었다.


나에게는 고향을 떠나온 타지의 생활이었기에 순간순간 이유 없이 울컷하는 외로움이 숨길 수 없는 이방인의 모습이 있었다.


Bad Soden am Taunus 우리가 살던 곳

우리 동네는 대도시 프랑크푸르트 인접 마을이었다.


독일은 다운타운 주변에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도무지 변하지도 않고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이사도 가지 않고 그대로 살고 있었다.

1920년의 모습
같은 장소의 2021년의 모습


관청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을을 알리는 동시에 그곳에 사는 자부심을 갖도록 노력을 한다.


해마다 공원 잔디에서 어린이들이 마을 모습을 그리는 미술대회를 개최해서 도서관 로비에 전시를 하기도 하고, 위의 사진처럼 오래전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버스 정류장이나 공원에 걸어 놓기도 한다.


몇 년 전부터는 젊은 이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하여 여러 소셜 미디어로 마을 모습뿐만 아니라 식당 소개며 열심히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인스타로 마을 소식을 서울에서 보고 있으며 그쪽에서 살던 시절을 생각하곤 한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어쩔 수 없이 집값에 대해 무관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마을의 기본적인 모습은 유지하려는 기본적인 베이스는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우리 아이가 공부하고 있는 도시에는 일 년 전쯤 이런 일이 있었다.


도시 곳곳에 있는 몇백 년 전에 만들어진 돌길은 아직도 멀쩡한데 십 년이 채 안된 아스팔트 도로는 자주 보수공사를 해야 한다고 도시 내의 자동차를 줄이자는 의견들이 나왔고 실제로 자동차가 훨씬 덜 다녔다고 한다.

돌길로 이루어진 시내

강제성 없이 시민들 스스로 수긍을 하며 조금 더 걸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든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늘어났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닐 텐데도 시민들은 그렇게 하였다.



내가 태어나고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대구다.


우리 집은 도심이지만 큰 도로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어서 동네 안에 낮은 산이 있었다.


근데 내가 독일에서 사는 동안 산이 없어지고 이웃동네로 바로 통과하는 도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살던 집은 수성구의 대표적인 아파트 단지가 되었다.


아버지와 이른 아침에 걷던 산이 없어지고 오랫동안 살았던 우리 집이 없어졌다는 건 발전된 고향의 모습에 대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솔직한 마음은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지 않다.


내 안에는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있는 거 같다.


아버지의 젊은 날의 모습과 어렸던 나 자신에게서 멀어져 진짜로 기억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면이 있는 거 같다.


나는 이렇게 고향 집을 잃어버렸지만 우리 아이들은 독일에서 처음 살던 그 동네를 언제든 방문해서 어린 시절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변하지 않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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