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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인간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광대한 고립무원'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는 공간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예를 들어 코마성단은 지구로부터 3억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이 순간에 코마성단에 있는 모든 별들이 초신성으로 변했다 해도, 우리가 그것을 보려면 3억 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코마성단에 살고 있는 어떤 천문학자가 지금 이 순간에 초대형 망원경으로 지구를 관측하고 있다면 그의 눈에는 고사리와 파충류만 보일 것이다(고사리가 살고 있는 3억 년 전에 지구를 떠난 빛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만리장성이나 에펠탑을 관측하려면 그 천문학자도 3억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시간의 제한은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한계이다. 138억 년 전에 우주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빛이 138억 년을 달리는 거리까지만 볼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을 우리는 우주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138억 년 전의 빛이라고 하지만 빅뱅 당시의 빛이 아니고, 빅뱅 30만 년 후의 빛이다. 그 전에는 빛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 지평선 너머에 있는 사건들을 볼 수가 없다.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기 때문에 그 너머의 빛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인류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을 볼 수가 없다.


빛은 아인슈타인이 밝혀냈듯이 속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은하에서 나온 빛은 우주가 끝날 때까지도 우리에게 도착하지 못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에 존재하는 천체들 중 거의 대부분은 아직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득한 옛날에 그곳에서 출발한 빛이 아직 지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빛은 지구와 태양이 수명을 다하여 사라진 후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우주전체의 크기를 지구의 크기로 축소시킨다면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공간은 모래알 한 톨 정도가 될 것이다.


1998년에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었다. 트루먼 버뱅크라는 사람의 삶을 태어날 때부터 유아 시절, 초등학교 입학, 대학 진학, 결혼 등으로 이어지는 삶을 몰래 찍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트루먼 본인은 자신이 촬영되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가 어릴 때부터 살아온 섬은 실제로는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된 거대한 세트장이다. 트루먼 쇼가 방영되는 동안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모습을 보고 그가 읊조리는 소리를 듣는다. 트루먼은 결국 자신의 모든 생활이 모두 조작되고 연출된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이러한 세트장이라도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사실 지구는 우주의 어느 곳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출입이 금지된 곳이나 다름이 없다. 누군가가 우주에서 인간과 생명을 지구로 보내놓고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정말로 우리는 광대한 우주 공간에 고립된 ‘섬’ 지구에 살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립무원(孤立無援) 속에 평생 ‘인간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광대한 세계’ 우주에 몰두하며 살았다. 아인슈타인은 “행복과 안위를 이루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소유나 과시 등은 나에게 언제나 치졸한 것으로 느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고립되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전부인양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아도 우리에게 아름다운 푸른 한 장의 사진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인간으로부터도 고립된 곳이 있다. 우루과이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 남대서양에 있는 트리스탄다쿠나(Tristan da Cunha) 제도가 그렇다. 사람이 사는 곳까지 가려면 2,000km를 가야한다. 1년에 몇 번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배가 다닌다. 이 섬에는 200여명이 살고 있지만 여기에 사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고립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 것이다. 이 사람들이나 우리나 별 차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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