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하정우는『걷는 사람, 하정우』(2018)를 출간하여 걷기를 예찬한다. 그는 하루 3만 보씩 걷고 가끔은 10만 보를 걷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만보’에 집착한다. 주위를 보면 너도나도 만보 계를 보며 오늘 하루 걸음수를 센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1만보 이상을 걷는 건 좋다. 그러나 알고 하자!
하루에 약 1만보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은 1960년대 일본에서 나왔지만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1965년 일본에서 계보기(pedometer)를 ‘만보 계’라는 이름으로 처음 출시했다. 이 일본회사가 시판한 ‘만보 계’의 마케팅에 놀아난 것이다. 하긴 교육에 있어서도 학자나 과학자들의 말은 무시하고 학원 마케팅에만 널뛰는 사회이다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루 최소한 1만 보를 걸어야만 건강해질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잘못된 고정관념이라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그럼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을 살펴보자.
하루 평균 4400보를 걷는 그룹은 2700보를 걷는 그룹에 비해 사망률이 41%나 낮다. 그러나 7500보 이상부터는 사망률이 감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루 7500보만 걸으면 사망률을 낮추는 효과가 충분하고 그 이상 걸어도 추가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하루 7700걸음 이상 걷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가장 낮았으며 하루 4400걸음 정도 걷는 할머니들의 사망률 또한 2000걸음 걷는 할머니들보다 낮았다. 재미있는 것은 7500걸음 이상을 넘어가면 사망률이 낮았지만 그 효과의 증가폭이 점차 줄어들어 미미했다는 사실이다.
가장 최근인 2023년 연구를 보면 하루에 약 2700보(약 2km)만 걸어도 조기 사망 위험, 심장마비나 뇌졸중 같은 심혈관질환을 11% 낮출 수 있다. 심혈관질환은 심장이나 혈관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을 총칭한다. 8700여 걸음을 걸으면 조기 사망이나 심혈관질환 발병 위험을 최대(60%)로 감소시킬 수 있다. 심혈관질환은 하루 7126보를 걸으면 51% 감소했다. 더 많이 걷는다고 건강이 나빠지지는 않지만 하루에 7000~9000보를 걷는 것과 비교했을 때 건강 효과가 더 커지지는 않는다. 만보는 만보 계를 팔려는 기업 마케팅에서 나온 숫자일 뿐이다. 게다가 걸음 숫자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걸음 속도가 더 중요하다.
보행속도를 기준으로 시속 4.8km 미만은 느린 보행자, 시속 6.4km 이상은 빠른 보행자, 그 사이는 보통 보행자이다. 운동량이나 신체활동 정도와는 관계없이 보행속도가 빠르거나 정상인 사람이 느린 사람보다 텔로미어(telomere)의 길이가 길다. 텔로미어가 길면 세포 손상이 덜해 노화 진행이 느리고 그만큼 수명도 길다. 걸음이 느린 사람은 건강하지 않게 노화함을 시사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빨리 걸으려고 시도하면 건강한 나이 듦을 누릴 수 있음을 시사한다. 미국인 50세 이상 여성 2만5000명을 대상으로 17년간 연구한 결과 시속 3.2~4.8km의 빠른 속도로 걷는 여성은 시속 3.2km 미만으로 걷는 여성에 비해 심부전 발생 위험이 27%, 시속 4.8km 이상으로 걷는 여성은 34% 낮았다. 걸음이 빠를수록 심장에도 좋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1만 보’ 같은 기준에 얽매이는 심리적 편향을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 부른다. 배가 닻을 내리면 움직이지 않는 모습을 비유한 표현이다. 인간의 편향성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 접한 정보,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은 정보로 편향성이 나타난다. 아무리 증거와 사실을 제시해도 별 소용이 없는 건 이러한 앵커링효과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입시(교육이 아니다!)와 관련한 자녀학습에도 학원의 마케팅의 앵커링 효과는 강력하다. 학원이 말을 하면 닻을 내리고 그 말만 따라한다. 교육학자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얘기해도 듣지 않는다. 얼마나 반지성적 반과학적인 사회인지 명백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