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8년 2월 인도네시아에 있던 월리스는 『변종이 원종에서 무한히 멀어져 가는 경향에 대해서』라는 요약 논문을 다윈에게 편지로 부쳤다. 편지는 배편으로 4개월이 지나서 다윈에게 도착했다. 생물종의 기원에 대하여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내용과 함께 ‘생존경쟁을 통해 하나의 종이 새로운 종으로 분화한다.’라는 자신의 이론을 정리해 영국 지식인 사회에서 유명 인사였던 다윈에게 검토를 요청한 것이었다. 다윈은 자신이 정립해온 이론을 요약한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단 하루라도 먼저 출판하는 게 기준인 학문의 세계에서 우선권은 투고 준비가 끝난 논문을 보내온 월리스에게 있었다. 고민에 빠진 다윈에게 학계 동료였던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과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Joseph Hooker)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월리스의 논문과 다윈이 1844년 자연선택에 관해 쓴 글, 다윈이 1857년 후커에게 쓴 자연선택론에 대한 편지 일부를 생물분류학회(런던 린네학회)에서 함께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다윈은 편지를 받은 지 단 13일 만인 1858년 7월 1일 학회에서 논문을 냈다. 1858년 7월 1일 찰스 라이엘은 다윈의 논문 「On the Tendency of Species to form Varieties; and on the Perpetuation of Varieties and Species by Natural Means of Selection」과 월리스의 논문 「On the Tendency of Varieties to depart indefinitely from the Original Type」을 린네학회(Linnean Society)에서 동시에 발표하고, 회보에 동시 게재하였다. 다윈이 1847년 후커에게 보낸 에세이, 1857년 하버드대학 에이사 그레이 교수에게 보낸 편지와 월리스가 보낸 편지 논문을 짜깁기해 런던 린네학회에서 ‘자연선택설’을 발표한 것이다. 월리스는 말레이군도에서 연구 중이라 오지 못했고, 평소 대중 앞에 서는 걸 꺼렸던 다윈도 학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8월 20일에는 두 논문이 드디어 런던린네학회지에 나란히 실렸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던 월리스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학회 발표 후 1년 반 후인 1859년 찰스 다윈 『종의 기원』초판을 출간하였다. 1859년 11월24일 지구의 한 귀퉁이 런던에서 인류 지성사의 대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찰스 다윈의『종의 기원』의 원래 제목은『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자연선택 혹은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의 보존에 의한 종의 기원에 대하여)』이다.『종의 기원』은 총 14장에 걸쳐 3막 극처럼 3단계로 펼쳐진다. 『종의 기원』 서문에서 “여기서 언급한 내용의 출처가 되는 참고 문헌이나 저자 중 일부를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쓴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독자들이 믿어주기 바란다.”라고 썼다. 표절 혐의가 있지만 당시에는 논란은 발생하지 않았다. 초판은 발매를 시작하자마자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872년 6판까지 출판되었다.
다윈의 표절의혹은 또 있다. 범죄학자 마이크 서튼(Mike Sutton)은 자신의 저서 『과학사기: 다윈의 패트릭 매튜 이론 표절』에서 다윈이 진화론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패트릭 매튜(Patrick Matthew; 1790~1874)가 1831년 발표한 자연선택이론과 다윈의 『종의 기원』이 너무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이론의 제목도 매튜의 ‘Natural Process of Selection’을 ‘Process of Natural Selection’으로 단어순서만 바꾸었다. 다윈의 아내가 된 외사촌 에마(Emma Wedgwood, 1808~1896)는 메튜로부터 질문 편지를 받고 메튜가 최초로 자연선택이론을 주장했음을 인정한다는 답장을 썼다고 한다.
1859년『종의 기원』이 출간됐고, 다윈이 진화론을 밝힌 과학자로 남았다. 다윈의 우월한 사회적·과학적 지위 때문인지, 월리스는 지금도 자연선택을 독자적으로 발견한 인물이라는 상징적인 칭호만 받고 있다. 사실 월리스가 먼저 자연선택 개념을 발견했는지, 다윈과 동시에 발견했는지, 누가 누구를 모방했는지는 확실치는 않다. 월리스는 나중에 ‘창조론’에 경도되면서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지게 된다. 다윈은 엄격한 자연선택을 고수했지만, 월리스는 인간의 기원과 관련해서 한 걸음 후퇴하여 ‘더 우월한 이성(Higher Intelligence)'이라 표현한 신적인 힘의 역할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윈과 월리스는 다윈이 죽을 때까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진화론에 대한 의견을 자주 주고받았다.
다윈은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종의 기원』의 초고 원본을 창고에 버렸다. 그의 자녀들은 이 종이로 그림을 그리거나 수학 문제를 풀었다. 사후에 일부 초고가 폐지 더미에서 발견됐고 대부분은 자녀들에게 유품으로 남겨졌다.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었고 전 세계에 흩어졌다. 이 초고는 한 장당 거의 100만 달러에 달하고 2018년 경매에서 마지막으로 낙찰된 초고는 49만 파운드(약 8억 원)를 기록했다. 2023년 찰스 다윈이 직접 쓴 일부 자필 초고가 온라인에 공개됐다. 이전 목록에는 없던 7장, 최근에 발견된 3장 등 총 59장의 『종의 기원』 자필초고이다. 공개된 초고는 총 1만1700단어로 종의 기원 전체 원고의 7.7%에 해당한다. 초고에는 곰이 고래로 진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반대에 부딪혀 이 주장은 삭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