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이다. 프랑스에는 우리에겐 낯 설은 ‘새로운 혼인제도’가 있다. 바로 팍스(Pacte Civil de Solidarité, PACS)이다. 공식적인 동거계약 관계로 법원이 아닌 시에 등록한다. 단순동거에 비해 혼인에 가깝고 결혼보다 느슨하다. 팍스는 1999년 혼외 출산 아이들 보호나 동성애자의 가정 형성을 법률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제정됐다. 당시 프랑스의 혼외 출산율은 약 40%로 높았으며 지금은 무려 60% 이상이다. 커플은 상대방을 ‘파트너’라고 소개한다. 이들 관계는 혼인관계와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는다. 기업은 결혼휴가처럼 팍스 휴가를 주며 정부는 세금 혜택을, 자녀에게는 혼인 부부의 아이와 똑같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인사이트 코리아, 2023.10.21.).
점점 많은 청년들이 팍스를 선택하고 있다. 팍스 체결 커플은 2007년 이전까지 매년 1만 명씩 늘어나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결혼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2만~3만 명씩 늘어났다(인사이트 코리아, 2023.10.21.). 2023년 팍스를 맺은 커플이 한해 20만 쌍을 돌파했다. 같은 해 결혼을 한 부부는 약 24만 쌍으로, 팍스와의 차이가 얼마 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에는 처음으로 팍스가 17만여 건, 결혼 15만여 건으로 앞지르기도 했다(국민일보, 2024.1.22.). 프랑스에서 대체로 동거, 팍스(출산) 또는 출산(팍스)에 이어서 결혼이 일반적인 루트로 자리 잡았음을 생각하면 이미 팍스가 팍스 단계를 거치지 않은 결혼보다 많을 가능성이 크다(인사이트 코리아, 2023.10.21.).
프랑스 청년들이 팍스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주거비가 매우 살인적이기 때문이다. 학업 혹은 좋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향하는 한국 청년처럼 프랑스 청년들도 임대료가 매우 비싼 파리로 들어온다(인사이트 코리아, 2023.10.21.).
또한 팍스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기대하는 가족으로부터 청년들을 해방시켜주고 청년들의 독립을 지원하는 효과를 낸다. 팍스는 가정 내 성 평등을 이끌어낸 제도이다. 팍스 가정이 결혼이나 동거 가정보다 집안일을 비교적 평등하게 나눈다. 이들의 성 평등 의식이 강한 이유는 여성 파트너가 고학력에 경제생활을 지속하기 때문이다. 팍스는 프랑스 사회의 성 평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팍스 커플이 기혼 부부보다 자녀들에게 성 평등 인식을 심어주는데 노력한다. 2019년생 프랑스 아이들의 81.5%는 아버지의 성만, 11.8%는 부모의 성을 모두 쓴다. 기혼 부부 아이들 가운데 부모 양성을 쓰는 경우는 5.6%인데 반해 미혼 커플(팍스 포함) 아이들 가운데 부모 양성을 사용하는 경우는 15.7%로 3배가량 많다. 프랑스는 2005년부터 아이들이 부모 양성을 쓸 수 있도록 가족법을 개정했다.
프랑스의 성 평등이 1968년 5월 발생한 ‘68혁명’ 영향이 크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프랑스 기혼 남성이 1주일 동안 집안일을 한 시간은 1985년 5시간 12분에서 1998년 4시간 37분으로 오히려 줄었다. 기혼 여성의 주당 가사노동 시간은 23시간 23분에서 20시간 56분으로 줄었다. 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에 따른 것이다. 68혁명을 주도하거나 이에 영향을 받는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늘릴 때 같은 세대 남성들은 오히려 과거 세대보다 집안일을 덜했다. 프랑스 남성의 가사노동은 팍스가 제도화 된 이후 늘어났다. 기혼 남성의 주당 가사노동 시간은 2009년 6시간 29분으로 증가했고, 여성과 동거 중인 남성의 주당 가사노동 시간도 1998년 5시간 43분에서 2009년 6시간 32분으로 늘었다(인사이트 코리아, 2023.10.21.).
우리나라도 팍스에 대해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4년 1월 4일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에 따르면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등록 동거혼 도입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혼인하지 않은 남녀가 ‘동거 신고’만 하면 국가가 기존 혼인 가족에 준하는 세금·복지 혜택 등을 제공하는 제도다(국민일보, 2024.1.22.).
늘 그랬듯이 개신교계는 반대한다. 팍스는 비혼을 조장하고 가족 해체, 혼인 외 출산율을 급증시킨다는 부작용이 있으며 동성 커플을 옹호하는 제도라는 비판이다. 동거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고 동거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정서적 불안정과 돌봄의 부재가 크다는 이유이다(국민일보, 2024.1.22.).
팍스가 아니라도 비혼은 가속도가 붙어 결혼하려는 청년이 거의 없어지고 있다. 혼인 외 출산에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회이다 보니 고아수출 세계1위라는 오명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이 제도는 동성 커플만을 위한 목적도 아니다. 성경에는 일부다처적인 모습이 많다. 일부일처제는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으로 정착된 것이지 윤리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인간은 일부1.5처제적인 또는 1처1.5부적인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 어디를 봐도 그렇다. 윤리적으로 그것을 지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이슈이다. 세상은 언제나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