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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인문사회

한국과 미국의 진화적 본능과 종파적 증오의 정치

2020년 ‘과학’ 저널「사이언스」는 정치를 다룬 논문을 게재하였다. 미국의 정치적 종파주의(sectarianism)가 타자 화(othering)와 혐오(aversion)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비판이었다. 미국의 사회 과학자들도 정치적 종족주의(tribalism)가 증가한다는 논문과 책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념 과잉과 갈등으로 어지럽다.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언론계도 그리고 지식인의 담론 구조도 모두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점철된다. 주요한 정책 쟁점마다 양극으로 나뉘어, 서로 날을 세우며 치열하게 격돌한다. 다툼은 있되 사회적 합의가 어렵고, 실제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사회가 양극화되고 정치가 극단적인 진영 논리에 빠진 상황에서는 ‘중도적 공론의 장'이 실종되었다(머니투데이, 2014.1.18.).


우리나라의 상황은 1946년 한반도 남쪽의 격렬한 좌우대립을 보는 것 같다. 민주주의 역사로 인한 과도기라고 하지만 한 세기가 되도록 지속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아서 혼란이 축약되어 일어난다고 긍정적으로 이해해야 할까. 좌우대립 또는 보수 진보대립은 언제까지 극단적으로 일어날까. 서로를 ‘증오’하는 ‘증오의 정치’는 언제나 끝날까. ‘개인’을 존중하는 반 전체주의,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민주주의는 언제나 가능할까. 말로만 하는 ‘진실’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정의는 언제나 실현될까.


정치가 상대진영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로 치닫는 것을 ‘정서적 양극화’라고 한다. ‘정서적 양극화’는 샨토 아이엔가(Shanto Iyengar) 스탠퍼드 대학 정치학 교수가 만든 용어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동물이며 생물학적 집단의식이 강하다. 인간의 본성을 변하지 않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왜곡된 정보로 확증편향이 강해지고 있고 심지어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로 이동하여 무리를 형성하는 분류(sorting) 현상까지 나타난다. 게다가 미국에서 가정 내 당파적 집단화도 증가하여 같은 당적을 가진 부부의 비율은 1965년 약 60%에서 85% 이상으로 급증했다. 『블루프린트』의 저자인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Nicholas A. Christakis) 예일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협력의 진화에 집단 간 증오가 필요했다.’고 분석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진화하면서 집단 내에서 협력하고, 경쟁자를 특정하여 싸워왔는데 그 현상이 지금 미국 정치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러 정당이 연립 정부를 구성하는 내각제가 아닌 미국 정치 시스템이 ‘외(外) 집단(out-group)’ 증오를 조장할 수 있는 환경이다(아시아투데이, 2024.1.21., Washington Post, 2024.1.20.).


미국과 한국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있다. 이는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에 뿌리를 둔, 상대방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에 기반하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의 반 이상이 상대방을 악(evil)으로 묘사하는 데 동의하는 비율도 거의 비슷하다. 2022년 상대방을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될 만한 특성이 부족하고 동물처럼 행동한다.’는 설문에 공화당과 민주당원 모두 약 30%가 동의했다(아시아투데이, 2024.1.21., 2024.1.20.).


이러한 진화론적이고 생물학적 정치 환경에서 ‘우리 대 그들’ ‘승리 대 패배’의 기치를 내건 후보가 적의와 분노의 흐름에 편승한다. 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양극화의 유일한 원인이거나 심지어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있으며 ‘분열과 정복(divide-and conquer) 정치’에서 거둔 승리를 통해 학습하는 노련한 정치 전문가들이 이를 악용·활용·조장한다. 특히 미국은 경쟁이 치열한 선거구가 줄어들고, 공화당과 민주당의 텃밭과 같은 곳이 더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하원의원들이 온건한 입장을 취할 이유가 거의 없어지면서 두 정당은 이념적으로 더욱더 멀어졌다. 당 지도부가 상대 당에 손을 내밀면 프라이머리(예비선거)에서 탈락할 가능성이 크다. 양극화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챈 트럼프 전 대통령이 2015년 대선 출마를 선언, 그 분열을 활용했다. 91개의 혐의로 4차례 형사 기소를 당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매우 헌신적인 지지층을 구축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트럼프의 기소가 잘못의 증거가 아니라 기존 엘리트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 반면 조 바이든 대통령을 비롯한 반대자들은 그를 민주주의에 실체적인 위협을 가하는 야심에 찬 독재자로 묘사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정치적 규범을 위반하는 선동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언론을 국민의 적으로 부르며 미국이 포위됐다는 환상을 조장했다. 인간은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진화론적으로 분쟁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정치인들이 이러한 경향을 잘 악용하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중에서 최고이다(아시아투데이, 2024.1.21., Washington Post, 2024.1.20.). 우리는 어떠한가?


민주주의란 아니 굳이 민주주의란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인간사회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를 배려하며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비하하고, 폄하하면서 심지어는 쌍욕을 하면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주의는 의견 일치를 이루기 위한 제도가 아니며 완벽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서로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방식이다. 우리 사회도 이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사는 방식이지 서로 저주하고 비난하는 방식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할 수는 없다. 논리란 우리가 본능적으로, 직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지 ‘진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와 다른 도덕적 가치 체계를 가진 사람을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진보와 보수는 음양처럼 서로 같아질 수는 없지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룰 수는 있다(머니투데이, 2013.1.1. 편집. 조너선 하이트, 사회 심리학자.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의 조직 윤리학 교수).


민주주의는 유인원 종에 나타나는 권력다툼과 신분제를 붕괴시키면서 시작되었다. 이제 민주주의는 자기집단과 ‘다른’ 집단 간의 생물학적인 분열과 정복이라는 생물학적 본능을 극복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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