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유대인의 종교인 유대교의 기초이다. 그러나 예수에게는 이것이 신앙으로서의 ‘최고’ 규범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율법은 유대인의 전통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보편적’인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유대민족’의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율법을 엄격하게 따르지는 않았다. 물론 예수도 당시의 율법을 일반적으로 충실히 지켰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서슴없이 유대인의 율법을 거슬러 행동했다.
예수는 율법을 상대화한 것이다. 유대인의 규범인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궁극기준도 아니다. 예수는 율법을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율법위에 있었다. 모든 복음서에서 두루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에는 자유가 드러난다.
율법은 ‘상대화’ 되고 예수와 새로운 계약을 맺는다(히브리서 8.6~8.13, 10.16~10.18.). 율법은 장차 올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였다는 것이다(로마 8.4, 골 2.17, 히브리서 10.1.). 율법은 불완전한 유대민족의 규범이었다. 이를 완성하고 ‘원죄’를 속하여 주려고 아들을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냈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로마 8.3~4.).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율법을 폐지했다는 구절이 나온다(에베소 2.14~15, 골로 2.14, 히브리서 7.18.). 율법을 폐지하고 완성했다고도 하였다(에베소서 2.14~15, 골로 2.14.). 율법의 말살이나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모순되게도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한다(마태 5.17.).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로마 3.31, 마태 5.17.).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완성되고 이루어진다(마태 5.17~18).
율법과 ‘바른’ 행위 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전혀 다르다. 예수가 말한 율법은 당시 유대민족의 삶의 지침이었다. 율법을 폐기했다는 것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폐기했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이것이 핵심이며 이것을 잘못 이해한 것이 오류의 출발이다. 예수는 인간 사랑이나 윤리를 도외시한 적이 없다. 산상설교의 대구(對句)들이 입증하듯이 예수는 ‘율법’을 강화했다. 성을 내는 것부터 이미 살인을, 남의 아내를 탐내는 것부터가 이미 간음을 뜻한다고(마태 5.21-22. 27-28). 예수는 올바른 삶을 분명히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