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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비극과 고통에 하지 말아야 할 말


2020년 5월부터 2021년 2월 24일까지 종교시설 집단감염 건수는 54건으로, 이 중 51건이 개신교회에서 나왔다. 개신교회 관련 감염자수는 전체 7천866명 중 2천953명이었다. 성당은 2건에 19명, 법당은 0건이었다. 신천지는 4천714명이다(연합뉴스, 2021.5.11.).


이 뉴스를 읽으면서 필자는 2014년 뉴스가 생각이 났다. 2014년 1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필리핀 방문 마지막 날 마닐라의 한 대학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12세 소녀가 교황에게 물었다. “많은 어린이들이 마약과 매춘에 내몰리고 있어요. 신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거죠? 왜 우리를 도와주는 어른들은 거의 없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교황은 소녀를 안아줄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황은 미리 준비한 영어 연설을 하는 것도 포기했다. 교황은 시간이 지난 뒤 대중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소녀는 아무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이다.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 마약을 먹는 아이들, 집이 없는 아이들, 방치되고 착취당한 아이들, 사회가 노예로 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우리가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말이다.” 이 소녀는 몇 해 전 집을 잃고 거리에서 살다가 최근 교회가 운영하는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녀로부터 예상 밖 질문을 받은 교황을 현장에서 지켜본 AP통신은 “교황이 거의 울 뻔했다.”고 전했다(경향신문, 2015.1.19.).


이 두 가지 뉴스는 기독교 신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고 역사도 길다. 바로 ‘변신론’ 또는 ‘신정론’이다. 신은 본성상 선하고 자비롭고 완전한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악과 결함, 불의가 존재하는가, 어떻게 이러한 괴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신이 세상일에 관여한다면 세상의 악은 신의 책임이고,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신은 악의적이거나 무능력한 존재라는 모순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흐름은 기독교의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러한 악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전능한 신이 창조한 이 세계에 왜 이렇게 악이 창궐할까?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러한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악을 인정하는 것은 신의 전능함에 위배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설을 주장하면서 악을 설명했다. 신은 인간을 완전하게 만들지 않았으며, 일정한 자유의지를 부여함으로써 죄와 악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도 ‘선한 사람이 불행을 겪고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것이 과연 신의 뜻이라는 것일까?’라는 의문에 대답할 수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이 세계에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으로 이 난제에 답한다. 그러나 신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다면 신은 악의적이거나 무능력한 존재라는 모순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자유의지에 의지한다. 신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주재할 뿐이며, 개개의 일들이 어떻게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의 악은 일시적인 과정이며 역사는 신이 이미 계획한 것의 실현이라는 입장이다. 역사에서 일어나는 숱한 비극들은 결국 신의 섭리를 보다 실현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가 보여주는 그 끔찍한 일들도 신이 구현하는 역사를 위한 것이고, 힘없는 자들의 몸서리쳐지는 고통들도 결국 신의 위대한 드라마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름 돋는 세상의 악과 비극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비극임을 우리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이제 시작이다. 기독교 내에서 많은 신학적 논의가 있어왔다. 하지만 제발 이 말만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하느님(하나님)의 뜻이겠지요.’라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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