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뇌는 생존과 복제를 목적으로 진화하였다. 생존을 위하여 주변 환경을 관찰하고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협력하면서 뇌가 발달하였다. 또한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한 개체와 종은 살아남았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좀 더 유연한 사고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유연한 뇌를 가진 개체가 유리했을 것이고 인간의 뇌는 점차 선천적인 유전자뿐만 아니라 변화가 가능한 유연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부른다. 가소성을 특징하는 인간의 뇌는 생존과 번식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관련 있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점점 확대되어갔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러 가지 실존적인 질문을 제기하였다. ‘우리는 누구인가?’ 등등.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은 큰 진보의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하여 우리 종의 등록 상표는 생각과 질문이 되었다. 이러한 의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같은 질문으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아무 것도 모르고 세상에 나타났다. 또한 우리는 그냥 시간이 흘러가면 늙고 병들고, 때로는 추악한 모습의 치매에 걸리기고 하고, 끔찍한 암에 걸려 고생하기도 하다가 시간에 떠밀려 결국 소멸한다. 그리고 우리가 낳은 후손이 또 같은 수레를 타고 같은 길을 걸어간다.
인간이 죽음을 인식하고 공포를 느끼거나 실존적인 고민을 하는 것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생명이 진화를 하면서 점차 인지기능이 발달하면서 서서히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속해있는 영장류나 유인원도 죽음을 인지하고 슬퍼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학자들은 영장류가 죽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를 해왔다. 2021년 연구를 보면 많은 영장류나 유인원들이 새끼가 죽으면 꽤 오랫동안 품고 다닌다는 것이 밝혀졌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 같은 유인원은 물론 긴꼬리원숭이의 원숭이 들 중 80%의 종이 그렇다. 이들이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거나 적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음을 알게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진화적으로 오래전 분기한 여우원숭이와 같은 영장류는 죽은 새끼를 품고 다니지 않고 시체가 있는 곳으로 오거나 새끼를 부를 때 내던 소리를 계속해서 내는 행동을 한다. 죽음에 대한 인식이 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미는 새끼가 더 어렸을 때 죽으면 오래 품고 다니지만, 젖 떼는 시기의 절반 정도에 이르자 급격히 줄었다.
https://royalsocietypublishing.org/doi/10.1098/rspb.2021.0590
오랜 진화로 지적능력이 좋아진 인간이 죽음을 더 깊이 인식되면서 삶이 고통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우연한 존재이고 죽으면 끝이라는 ‘무상함’은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필연성’ 또는 ‘영원함’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죽음을 의식하면서 신화와 종교가 나타났다. 인도인들은 윤회와 환생을 믿는다. 인도 바라나시에 가면 강가에서 망자를 화장을 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사람들은 신화에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을 찾았고, 우주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세계지식을 얻었다. 2006년 슈테판 클라인은『우연의 법칙』에서 뇌의 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신경세포의 작용으로 뇌는 주변을 일관된 틀로 인식하려는 본능을 갖는다고 보았다. 뇌는 그 틀에 맞는 것만 보려는 ‘선택적 인지’를 하려고 하고 우연을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선택적 인지는 우연을 회피하고 절대적인 신을 믿고 자신의 영원성 즉 구원을 받아들이는 ‘본능’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랜 세월 인간은 자신의 필연성과 영원을 ‘신’에서 찾았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아지트 바르키와 대니 브라워가 쓴『부정본능(Denial)』(2015년 번역출간)은 인간의 ‘현실 부정’ 성향이 인간이 독보적인 존재로 진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초기 인류는 진화를 거듭하여 지능이 발전하면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알고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이를 회피하고자 현실을 부정하는 능력을 진화시키면서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음의 공포라는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은 것은 바로 ‘부정하는 능력’이라는 주장이다. “의식하게 되면 참을 수 없는 사고, 감정 또는 사실들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불안을 누그러트리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부정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고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것이 언제인지라는 것이다. 그 ‘언제’까지는 살아야하므로 죽음을 잊고서 삶을 이끌어간다. 그래서 일부 인류학자는 죽음에 대한 거부나 공포가 인류 문명과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보기도 한다. 인간의 문화 중에는 비록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정신은 영속할 것이라는 관념이 나타났고 종교문화도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고 종교적이고 신화적 사고는 이성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성(logos)이 태동한 것이다. 자연현상들을 신화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신이나 그럴듯하게 꾸민 이야기, 검증되지 않은 전통에 기대지 않고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바로 과학의 탄생이다. 그 과학이 신은 인간의 뇌에서 생겨났으며 종교적 믿음은 뇌 진화의 부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필연성을 ‘신’에서 찾으려하지만 과학은 ‘어처구니없게도’ 신을 진화, 뇌와 유전자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과학이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같은 극단적인 과학주의자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 등 우리가 문화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진화, 뇌 및 유전자로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 음악과 예술 그리고 종교도 진화와 유전자 그리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거나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우주와 자연, 생명과 인간의 기원과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인간이 의문을 제기하고 윤리나 철학 같은 추상적 사고를 하고 수학과 과학 같은 분석능력을 가진 것은 인간의 진화로부터 나타난 유전자와 뇌 구조 및 기능의 독특한 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탐험의 욕구는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나그네로 시작했으며 나그네로 남아 있다. 인류는 우주의 해안에서 충분히 긴 시간을 꾸물대며 꿈을 키워 왔다. 이제야 비로소 별들을 향해 돛을 올릴 준비가 끝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