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자와 사토시(Kanazawa Satoshi)는 자신의 저서『지능의 사생활』(2012년 번역출간)에서 지능은 인간의 성향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지능에 따라 정치적인 성향이나 종교적인 성향도 다르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진보주의자가 많고, 무신론자가 많다. 이것이 말해주는 것은 지능이 높을수록 ‘대체로’ 호기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 호기심이 인간을 의심으로 이끌어갔고 과학으로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 하나는 유별난 호기심이다. 삼라만상에 호기심을 갖는다. 인간은 그 호기심을 가능하게 한 자신의 지능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품는다.” 아마도 과학적인 호기심은 가장 마지막에 나타났고 최후의 지능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는.
그러나 인간의 과학적인 호기심은 짧은 기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과학의 기초가 되는 숫자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보면 길고 긴 진화의 과정에서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수를 세는 능력이 있다. 식충 식물인 파리지옥은 먹이가 와서 앉으면 잎을 오므려 붙잡은 뒤 소화액을 분비한다. 먹이를 잡기 위해 파리지옥은 곤충이 잎에 몇 번 접촉했는지에 따라 움직인다. 2번 접촉하면 잎을 오므리고 3번쯤 더 접촉하면 소화액을 분비하기 시작한다. 숫자를 알아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개미는 페르마의 원리(Fermat’s Principle)에 따라 이동한다. 페르마의 원리는 빛이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경로로 이동한다는 원리다. 공기 중에서 물속으로 빛을 비추면 공기와 물의 경계에서 빛이 방향을 꺾는다. 물속에서는 빛의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경로로 가려면 물속에서 움직이는 시간을 줄이고 공기 중에서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이게 바로 굴절의 원리다. 개미 무리는 재질이 다른 두 가지 표면의 경계에서 진행 방향을 바꾼다. 개미의 경로는 페르마의 원리에 따라 계산한 경로와 비슷했다. 울퉁불퉁해서 걷기 힘든 데서는 조금 걷고 매끄러워 걷기 쉬운 데서 많이 걸었다. 물론 개미가 페르마의 원리를 알 리가 없다. 진화과정에서 생존을 위하여 그런 효율적인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개미나 꿀벌, 물고기처럼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은 때때로 사람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로 효율적인 집단행동을 보여준다. 비록 이해하고 하는 행동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고도의 수학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일부 새는 숫자 감각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까마귀이다. 심지어 까마귀가 ‘0’을 이해한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개도 수에 대한 기초적인 감각이 있다. 인간이 ‘0’을 안 것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0’을 인식하는 동물은 인간을 제외하고 3종이 더 있다. 히말라야원숭이와 꿀벌, 까마귀이다. 하나는 포유류이고 하나는 조류, 하나는 곤충으로 서로 분류가 다르다. ‘0’을 수로 인식하는 능력이 동물계에서 여러 차례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며, 그런 능력이 공통적으로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동물의 수학 능력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우리 인간의 수학 능력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어쩌면 수학 능력의 발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수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대 이후 과학이 탐구의 중심에 서기 전에는 종교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근대과학의 초기에는 과학과 종교가 복잡하게 얽혀져 있었다. 16~18세기의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은 공통적으로 신과 신앙을 여전히 고려한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근대과학자인 뉴턴의 과학연구도 자신의 영성과 종교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하느님은 세계를 통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는 믿었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은 하느님을 연구하는 것이고, 과학에 대한 열정은 종교적 열정의 한 형태였다.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던 데카르트도 절대적 진리를 갈망한 사람이다. 1641년 출간한 자신의 책(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에서 신앙을 옹호하려는 시도를 했다. 파스칼도 전지전능한 신에 부정적이었으나 자신의 책(팡세)에서 기독교의 신을 긍정했다. 당시에는 신과 과학은 괴리되지 않았던 시대였다.
21세기 들어서도 신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만 진지하게 성찰하는 사람은 적다. 과학의 발전으로 혼란스런 신앙인들은 생각하기를 멀리하고 무신론자들은 아예 신에 대해 말하기조차 않는다. 질문 없는 신앙인과 무관심한 무신론자의 모습이 21세기의 모습이며 과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사람마다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정도는 다르며 지능이 높다고 이런 주제에 고민을 더 많이 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먹고사는 문제, 자기가 사는 세상과 그 시대에만 관심을 두는 반면 어떤 사람은 백억 년이 넘는 우주, 생명, 인간, 문명 진화의 오랜 역사와 광대한 우주에 늘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사람은 신앙에만 매달리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앙을 부인하고 과학에 매진한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왜 있어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스스로 그 질문에 천착한다. 어떤 사람은 신앙과 과학을 동시에 추구한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지능이 좋은 사람도 과학이나 탐구나 학문에 무관심하거나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IQ나 미국 대학 입시시험(Scholastic Aptitude Test, SAT)은 언어와 수학 능력을 중심으로 검사하는 테스트이다. 지능을 측정하는 것은 190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알프레드 비네의 IQ 검사, 대니얼 골만의 EQ 검사,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 등으로 이어졌다. 20세기 들어 새로이 제기된 ‘실존’ 지능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같은 근원적인 의문에 관심을 가지는 특징을 나타낸다. 1983년『Frames of Mind: The Multiple Intelligences』을 출간한 하버드대학교 가드너 교수는 기존 IQ 테스트에서 집중했던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에 음악지능, 신체운동지능, 공간지능, 대인지능, 자성지능 등을 포함하는 다중지능(Multiple Intelligence) 이론을 제기하면서 실존지능을 포함시켰다. 지능에 대한 이 같은 개념은 교육계에 널리 받아들여져 지적 능력이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었다. 기존의 언어지능과 논리·수학능력의 지능은 ‘공적인’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학교를 떠나 사회에 진출하면 다른 요인도 중요하다. ‘왜 사는가? 인간은 어디서 오는가?’ 같은 질문과 관련된 실존지능은 특별한 성향의 소유자에게 강하게 나타난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자아 인식이 높고, 전체적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왜’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근본적인 답을 찾으려는 뚜렷한 성향을 보이며, 전통과 관습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왜 사는가? 인간은 어디서 오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등의 질문은 논리·수학적 지능이나 언어지능이 높다고 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분명 아니다. 실존 지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더 넓고 깊은 맥락에서 보고 싶어 한다. 실존지능이 높은 사람은 감정의 기복이나 동요가 작고, 정의 관념이 강하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물질주의, 무신론, 자기중심주의 등으로 ‘집단적인’ 실존지능 저하의 시대이다.
난 특별한 재능은 없다. 단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질 뿐이다.
I have no special talents. I am only passionately curious.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사람을 과학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기의 하나는 고통스럽게 조잡하고 희망 없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이다.…과학은 우주와 그 구조를 감정적 생활의 중심축이 되게 만든다. 개인적 경험이라는 좁은 소용돌이 속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평화와 안전을 그 곳에서 찾을 수 있다(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요절한 이상(1910~1937)은 1937년에 발표한 수필『권태』에서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 때보다도 몇 배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지식인은 섹스보다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An intellectual is someone who has found something more interesting than sex.
에드가 월리스( Edgar Wallace, 1875~1932)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쓴『시지프의 신화』(The Myth of Sisyphus)에도 권태에 대한 표현이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네 시간 근무, 점심, 네 시간 근무 또는 야근, 저녁식사, 취침,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송년회, 여행, 아이의 출생·입학·취업·결혼, 노년 그리고 죽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상이고 삶이다. 카뮈는 이러한 인간의 삶을 ‘부조리’라고 말했다.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이 덧없고 무의미한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말이다. 많은 사람이 그냥 일상 속의 삶을 즐기고 종교에 귀의하여 ‘평화롭게’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자살을 택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부조리한 삶을 수용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삶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카뮈가 선택한 삶이다.『시지프의 신화』는 꼭대기로 올려도 계속 다시 굴러 떨어지는 돌을 짊어질 수밖에 없는 시지프의 고통을 말한다. 그것은 시계추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삶을 긍정하고 저항하며 주인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삶을 선택한다. 침묵하는 우주 안에서, 우연의 진화에서 스스로 주인으로 세상을 창조하며 살아간다. 설령 삶이 무의미하더라도 내겐 내가 만들어낸 세계가 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호기심이나 과학적인 탐구 성향의 차이와 관련된 뇌 과학의 증거가 있다. 도파민은 뇌의 신경세포 간에 신호를 전달하기 위해 분비되어 도파민 수용 체를 활성화시킨다. 수용 체는 호르몬에 반응하여 세포 기능을 변화시키는 물질이다.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는 탐구 성향(novelty seeking trait)은 특히 도파민 D4 수용 체(Dopamine D4 Receptor)와 관련이 있다. 총 네 개의 엑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세 번째 엑손(DRD4 exon III)은 사람에 따라 변이가 심하다. 엑손(Exon)은 DNA 염기 서열 중 단백질의 구성정보를 담고 있는 부분이다. 세 번째 엑손에는 ‘염기반복’(variable number tandem repeat, VNTR)이라는 것이 있고 2, 4, 7 반복형이 많다. 즉 특정한 유전자 부분이 어떤 사람은 2개, 어떤 사람은 4개, 어떤 사람은 7개 있다. ‘7’ 반복을 보이는 사람은 도파민 수치가 더 높다. 이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행동을 촉발하게 된다. 이들은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여행을 즐긴다. 전 세계 36개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는 모든 인구 집단에서 ‘4’가 많았다. 어느 인구집단에서나 ‘7’ 변이를 가진 사람은 소수이다. ‘7’의 비율은 인구 집단 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유럽인과 아메리카인은 많았고, 아시아인은 아주 드물었다. ‘7’ 변이형을 가진 아시아인의 비율은 다른 인구 집단의 1/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7’ 변이형을 가진 사람은 어느 집단에나 어느 정도 있었는데, 아시아에서만 유독 줄어들었다는 가설이 있다. 동아시아 지역은 권위적인 봉건 사회가 오랫동안 유지되면서 진취적인 사람이 점점 불리해졌다는 주장이다. 수렵채집사회에서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 도움이 되지만(새로운 사냥감이나 과일), 농경 사회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 관료주의 사회에서는 ‘튀는’ 사람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농업 혁명은 아시아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다. 유독 아시아에서만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성격이 불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인간의 성격은 다양한 요인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어느 단일한 유전자 변이로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다만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인간이 아프리카를 떠나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남극과 에베레스트, 심지어 달까지 정복한 모험가의 피가 흐르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