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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도 여전히 그(그녀)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결혼하는 사람도 결혼식 준비를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는다. 그 안에는 그 많은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과 갈등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혼수갈등’ 기사는 우리사회의 문제만도, 오늘날의 문제만도 아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결혼은 그리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농업혁명으로 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인간을 상상해보자. 사냥을 하고 산과 바다로 먹을 것을 채취하고 살았다. 법이나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생물학적으로 일부일처제의 유전자와 일부다처제의 유전자의 중간쯤에 속한 인간은 일부일처 형식의 부부생활을 했지만 난잡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인간의 엄격한 일부일처제 ‘생명’은 아니다. 구애를 통한 부부생활도 있었겠지만 ‘여자’ 약탈도 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결혼은 신부를 약탈하는 방식으로부터 시작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초기 인류는 식량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여자 아이를 살해했다. 그것은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그런 나라는 꽤 있다. 이것은 나름의 인구 조절 기능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성이 부족했고 아이를 낳을 여성을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신부가 머리에 쓰는 면사포는 어망을 사용하여 신부를 약탈하던 북유럽 게르만족의 변형된 유물이라고 한다(오마이뉴스, 2022.9.8.).


면사포를 쓰지 말자. 약탈된 신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면서 큰 강을 중심으로 문명이 태동하고 그것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수렵채취 사회와 농경사회는 살아가는 풍경을 크게 바꾸었을 것이다.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약탈혼은 ‘매매’혼으로 바뀌었다. 반지는 매매혼의 착수금 역할을 했다. 서기 860년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약혼에는 약혼반지가 필요하다.’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여성이 결혼을 파기한 경우 반지를 돌려줘야 했다. 계약위반이기 때문이다(오마이뉴스, 2022.9.8.). 


반지를 끼지 말자. 거래로 팔려가는 신부가 아니다.


과거 딸은 아버지의 소유였던 만큼 딸을 데려가려면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점차 아버지 쪽에서 신랑이 준 돈에 선물로 보답하는 것이 통례였고, 이 금액은 시간이 갈수록 신랑 쪽이 내놓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부자 아버지들은 딸이 시집가서 평탄하게 살 수 있게 선물 규모를 서서히 늘려 나갔고, 이는 마침내 신부 지참금 제도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혼수를 받지 말자.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중세의 결혼은 철저하게 전략적인 일이었다. 결혼을 통해 전쟁을 막고,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을 나누거나 집중하였다. 결혼식은 여자가 아버지의 ‘소유’였다가 남편의 ‘소유’로 넘어가는 것을 알리는 일이었다. 일종의 ‘동맹’ 선언이었던 것이다.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의식의 기원이다. 내 딸을 줄 테니, 내 땅을 침략하지 말라는 의식이다(오마이뉴스, 2022.9.8.). 


부유한 가문일수록 자녀들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킴으로써 부와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 하층계급도 결혼은 경제적 거래이자, 정치적 거래였다. 당시의 결혼은 집안 간의 결합이지, 개인 간의 결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안끼리 혼인을 시작할 때 반드시 중매로 해야 했고 그 절차를 중요시했다. 『예기(禮記)』 내칙에 “예를 갖추었으면 처가 되고, 임의로 관계를 맺었으면 첩이 된다(聘則爲妻, 奔則爲妾).”는 말이 있을 정도다. 결혼은 두 집안의 관계 맺음을 뜻하고, 결혼의 의사결정권은 결혼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들에게 있었다. 과거 이탈리아에서도 혼인을 가문 간의 계약 관계로 여겼으며 계약서를 작성해 이해관계를 따졌다. 현대 이탈리아어의 혼인은 ‘contrare il matrimonio’인데 혼인을 계약한다는 뜻이다(영남일보, 2015.1.1. 편집). 


이탈리아에서는 지참금은 보통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의 아버지에게 직접 전달한다. 이때 시아버지는 지참금을 자식을 위해 사용하고 헛되이 탕진하지 않을 것은 물론 며느리가 사망하면 반환하겠다는 것을 문서로 약속했다. 즉 이탈리아에서 혼인은 개인들의 애정 관계가 아닌 두 가문의 이해관계로 바라보았으며 가문 간의 계약 관계인 것이다. 만약 지참금 없이 딸을 혼인시키는 것은 설사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치욕적인 불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적지 않은 지참금을 마련하는 일은 일부 부유한 권력계층을 제외하고는 결코 쉽지 않았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특히 지방 자치도시들의 정부는 지참금 펀드를 운영했다. 아버지가 딸의 출생과 거의 동시에 혼인 시기를 예상하여 일정 기간 동안 적금 형태로 목돈을 모을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여러 가문들은 딸들의 지참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정한 금액의 돈을 정기적으로 저축했다고 한다. 권력 가문의 집안이 아닌 하녀 출신의 여성들에게도 혼인을 위해 지참금이 필요했다. 이때를 대비해 고용주가 고용인 여자의 혼인날에 품삯의 전액 지급을 약조하는 일종의 노동 지참금 계약을 맺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결혼의 지참금 제도가 지금의 금융기관 발전에 기여했을지도 모르겠다(레이디경향, 2006.5.18. 편집).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에는 사색당파가 학맥에 따라 형성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혼 맥(婚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론은 노론끼리, 소론은 소론끼리, 남인은 남인끼리 혼사를 치르며 정치집단을 형성했다. 조선후기에 결혼은 정치 성향과 학맥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 아니라,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해야 했다.’ 성적 매력이나 용모에 이끌려 결정하는 남녀상열혼(男女相悅婚)은 유교적 윤리관에서 금기시했다. 부모가 충분히 숙고한 끝에 환경이 비슷한 사람과 혼인을 맺어준 만큼, 부부는 문화적 배경과 정치·경제적 입장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혼인할 때부터 신중을 기한 만큼 헤어지는 것이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이 바탕에는 감내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희생이 있었음은 물론이다(영남일보, 2015.1.1. 편집).


결혼을 장사로 여겼던, 딸을 ‘팔아먹는’ 것으로 여겼던 악습이 오늘날에도 엄연하게 존재한다. 지금도 정략결혼과 매매혼 개념은 널리 남아있다. 우리나라의 결혼은 ‘남자는 집, 여자는 혼수’를 주고받는 일이 공공연하다. ‘강남에 전셋집을 마련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라는 요구는 보통 있는 일이 되었다. 돈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세대가 탄생했고 실제로 많은 청년들은 결혼하지 못하거나 안 한다. 게다가 비싼 예단, 예물 등으로 심각한 고통과 상처를 받는다. 21세기에도 우리라나는 중세의 매매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천문학적인 과다 혼수비용이라는 제약조건 때문에 결혼을 제때하지 못하고 미루거나 기피하고 있다.  ‘평생 단 한 번뿐인 결혼’이라는 생각에 무리해서 결혼식을 치르려 하는 것은 어느 세대에나 있어 왔다.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 남녀는 결혼은 그저 ‘비용이 많이 드는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혼을 유보하거나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리고 결혼 제도를 거부하는 동거 족, 혼인 후에도 자녀를 낳지 않겠다는 딩크족, 결혼할 생각이 없는 비 혼자 등이 다양하다.


지참금을 주고받지 말자. 결혼을 하는 것이지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세에는 권력과 재력을 통합해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호화스러운 결혼식을 했다. 그것은 웨딩드레스의 색으로 드러났다. 웨딩드레스는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상이 호화롭게 이용됐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것이 전 세계의 뉴스와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큰 주목을 받았고 이것이 현재 웨딩드레스의 형태가 됐다. 단 하루를 위해 수백만 원의 대여료로 입을 수밖에 없는 웨딩드레스의 기원이다. 결혼식은 이제 단 하루 동안 영국 귀족 흉내를 내며 즐거워하는 일과 다름없어 보인다. 당당히 귀족 놀이를 할 수 있는 평생의 단 한 번 있는 유일한 순간이 된 것이다. 호텔 예식은 예비 신랑 신부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고 ‘평생의 한 번’ 귀족이 되는 상술은 호화롭다. 우리나라 사회는 ‘정신적으로’ 허약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나 재산으로 규정짓는 풍조가 강하다. 결혼식장의 호화로움과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그것을 보여주고 싶다(오마이뉴스, 2022.9.8.).


호텔에서 결혼하지 말자. 귀족놀이 하지 말고 정신적으로 귀인으로 살자.


종교를 떠나 세속적으로도 현대사회는 자유연애, 연애결혼 관념은 상식이 되었다. 남녀의 순수한 사랑은 가문, 학벌, 종교, 나이를 초월해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다. 결혼은 가족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관념이다. 미국이나 유럽도 18세기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60년대 보편화되었고, 우리는 80~90년대에 널리 퍼졌다. 결혼의 결정권이 부모에서 당사자들로 옮겨왔고 다시 한 세대가 흘렀다(영남일보, 2015.1.1. 편집). 하지만 여전히 결혼은 사적인 영역을 벗어나있다. 물론 결혼은 사회 안에서의 기능이며 사회와 가족안의 제도이다. 결혼이 부모형제와 관계와 전혀 무관한 ‘자기들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그 기초는 당사자 간이 선택이자 사적인 경역이고 순수한 영역이어야 하지 않을까. 앞서 보았듯이 혼수는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과거에도 순수한 결혼 관념은 존재했다. “혼인 때는 남자 집에서 돼지와 술을 보내는 것으로 끝난다. 재물이 없이 결혼하는 것이 예법이다. 만약 재물을 받는 사람이 있으면 딸자식을 계집종으로 파는 것으로 생각해 부끄럽게 여겼다(男家送猪酒而已 無財聘之禮 或有受財者 人共恥之 以爲賣婢).” 『북사(北史)』 ‘열전’ 등에 나온 고구려의 혼인풍속이다. 한마디로 혼수품은 신랑 집에서 가져오는 돼지와 술뿐이라는 것이다. 또 혼수를 받는 행위는 마치 딸을 노비처럼 파는 것으로 여겨 매우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질박한 결혼풍습인가(경향신문, 2013,7.8.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상)딸 낳으면 집안이 망한다. 편집).


결혼은 가장 ‘사적인’ 영역이다. 배우자는 생의 동반자이며 가장 사적인 실존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친구이기도 하다. 거기에 경제적인 동기, 사회문화적인 결합, 욕구가 개입되는 것을 원하는가? 그럼 결혼하지 말고 열심히 돈을 벌어라. 


니체가 말했다. “결혼하기 전 스스로 물어보아라. 나는 늙어서도 여전히 이 여자와 대화를 계속 나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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