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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가면서 생각해보는 죽음, 존엄한 죽음


프로이트는 1929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안락사 시켜 주기로 약속했던 주치의에게 마지막 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처음 나눴던 대화대로 해주게. 이제 고문 받는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네.” 딸 안나는 슬퍼하며 아버지의 선택에 동의했다. 주치의인 슈어는 치사량에 이르는 모르핀을 9월21일과 그 이튿날, 세 번에 걸쳐 투여했다. 프로이트는 독일어로 “고맙네.”라고 말한 뒤 곧 의식을 잃었고, 이틀간 혼수상태에 있다 23일 새벽 사망했다. 유대인임에도 평생 무신론자로 산 프로이트는 죽음의 순간에 어떤 종교 의식도 청하지 않았다.


‘나는 고통스럽고 죽길 원하며 죽고자 한다.’라는 말을 복창하면 약물을 투여한다. 모든 것이 끝나면 경찰과 검시관이 오고 동행한 사람은 돌아간다. 안락사 또는 존엄사의 현장이다. 이를 지켜본 사람은 누구나 마음이 무겁다. 죽음을 바라보는 것이 ‘존엄’할 수는 없다. 죽음 대신에 호스피스를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스피스는 본인의 고통은 물론 가족의 고통은 말도 못한다.


네덜란드 신경의학자 디크 스왑(Dick F. Swaab)은 의대 실습생 시절 심폐 소생술로 환자를 구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간호사가 그 환자를 침대에 눕힌 채 병실로 옮기는데 갑자기 심장 박동이 정지했다. 그 즉시 배운 대로 실행에 옮겼으며 환자를 소생시켰다. 얼마 후 그 환자의 진료기록이 도착했다. 그는 암이 심장으로 번진 폐암 환자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밤낮으로 그 가엾은 남자의 침대 옆에 앉아서, 그가 약간의 공기를 호흡할 수 있도록 기도를 뚫어주는 일을 했다. 그를 소생시키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그런 큰 고통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살려야 했을까? 무지무지한 고통을 감내하고라도 살아있게 하는 것이 인간적인가? 아니면 신의 뜻인가?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하여 보수적인 그리스도교는 물론 반대할 것이다. 항상 이들은 ‘뭐든지’ 반대해왔다. 꽤 많은 세월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뀐다. 오래전 신의 뜻이라면서 백신도 거절했지만 지금은 열심히 접종한다. 다음은 안락사에 관한 논쟁에 대한 책을 쓴 고 한스 큉 신부의 생각은 이렇다. “인간의 책임은 삶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삶의 끝과 관련해서도 부여받았으며, 인간은 오늘날 『성서』에서 단순한 처방들을 끌어낼 수 없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처해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지난 100년 사이에 며칠 못가거나 기껏해야 몇 달 가지 못했던 죽음을 대부분의 경우 더욱 길게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해서 치명적인 병의 시작과 끝 또는 총체적 노화의 시작과 끝 사이의 시간은 수년, 경우에 따라서는 10여년 이상 길게 연장될 수 있다. 이제까지 태내기, 유아기, 사춘기, 장년기, 노령기의 단계로 구분되던 인간의 삶은 이런 식으로 삶이 연장됨으로써 그 규정이 혼란스럽게 되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이나 하느님의 의지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시키는 인간의 노력에 따른 것이다. 인간은 이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의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또한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적이면서도 시대에 걸맞게 시도되어야 할 윤리는 이처럼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여 탄생규정에 대한 물음과 마찬가지로 안락사에서도 자기 위치를 더욱 면밀하게 숙고하게 될 것이며,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하여 책임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안락사나 존엄사는 나온 것은 인간이 자연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학이 없다면 인간의 자연수명은 50살도 되지 않는다. 현대의학의 소생술의 발달이 만들어낸 새로운 환자가 있다. 생명은 유지하고 있으나, 움직이지 못한다. 이들은 의식이 없거나 거의 없는 상태 때로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 있기도 한다. 현대의학은 이들을 4단계로 구분한다. 감각능력도 의식도 없는 ‘혼수상태’, 감각, 반사작용은 있지만, 의식은 없는 ‘식물상태’, 감각도 있고 고통과 같은 감정도 느끼지만, 의식은 미미한 ‘최소의식상태’, 그리고 감각도 의식도 있지만, 사지가 거의 마비상태인 ‘감금증후군’으로 나눌 수 있다. 산 채로 육신의 감옥에 유폐된 사람들이 감금증후군(locked-in syndrome) 환자로, 멀쩡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몸이 거의 마비된 것이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육신 속에 의식만이 작동하는 끔찍한 삶을 선고 받은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한 감금증후군 환자가 쓴 자서전에는 이렇게 외쳤다. “그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십 분도 못 참겠다는 것을! 움직이고 싶다는 것을! 아프지 않는 데가 없다는 것을! 경련이 심하다는 것을! 숨쉬기도 고통스럽다는 것을! 이 침대, 이 장소, 이 불결한 병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을!” 도대체 의학이 무슨 권리로 한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형벌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당시만 해도 프랑스에서는 수동적 안락사가 허용되지 않는 때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안락사할 권리를 탄원해보기도 하였다. 자서전을 이렇게 끝낸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복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나의 자유를 되찾아 줄 만큼 막강한 열쇠는 없을까? 다른 곳에서 구해 보아야겠다. 나는 그곳으로 간다.” 잠수복을 벗어 던지는 길, 육신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죽음뿐이었던 것이다. “죽고 싶다, 죽여 달라!”는 그의 처절한 외침이 프랑스에서 반향을 불러 일으켜 2005년 레오네티(Leonetti) 법안을 탄생시켰다. 즉 치료를 중단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는 불러왔지만, 죽음을 곧바로 야기하는 독극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는다.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으면서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도 없는 사람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살지도 죽지도 못해 신음하는 사람들, 의술이 만들어 준 육신의 감옥에 갇힌 채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일다, 2013.10.31. 이경신).


스위스에서 시작된 안락사 제도가 유럽에서 널리 퍼지고 미국도 여러 주, 캐나다, 호주 일부 주, 남미 콜롬비아 등도 도입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락사를 금기시하여 일부 고통을 당하는 환자들은 유럽으로 가서 안락사를 택한다. 스위스는 1942년부터 안락사가 용인되었다. 


스위스 「형법」은 ‘이기적인 동기’로 타인의 자살이나 자살 시도를 유발하거나 도와주어 만일 그가 실제 자살을 하거나 자살 시도를 하였다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면 처벌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국인 조력자살에 대하여 규제하거나 처벌하는 조항이 없다. 반면 우리나라 형법은 비록 환자를 위해 선의로 도와주어도 처벌받는다. 


2016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결정에 관한 법률」법안이 공포되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김 할머니에 대해 연명 의료중단 결정을 내린 2009년 역사적 대법원 판결이 전기가 되었다. 기계에 매달린 채 준비 안 된 죽음을 비참하게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다. 2019년 설문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의 80%가 안락사에 찬성했다. 존엄사가 국내에 도입되었지만 여전히 유명무실하다. 우리나라 사람 80% 이상이 ‘더 적극적인 안락사’ 법률 개정에 찬성한다.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시행하는 단체는 많다. 처음에는 말기 암이나 전신 마비 환자에게 허용되었으나 우울증을 앓아 삶의 욕구를 잃은 사람까지 허용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의료 기록과 온전한 정신으로 스스로 결정하면 인정한다. 스위스가 안락사를 용인한 것은 개인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정서도 있지만 높은 자살률도 한 가지 이유로 꼽는다. 자살을 방지할 수 없다면 인간답게 죽는 방법을 열어두자는 것이다. 안락사가 활성화해서인지 이후 스위스 자살률은 점차 내려갔다. 


반면 우리나라는 이전보다 자살률이 크게 늘었고 경제협력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특히 노인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기구 국가 평균의 세 배가 넘는다. 우리나라 사람의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병고에 시달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족에게 누가 될까 봐서 극단적 선택을 한다. 그러나 자살은 가족에게도 큰 상처를 준다. 안락사가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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