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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죽는 날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최후에는 혼자서 자신만의 자기 고유의 죽음을 맞이한다. 결정적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고요하고 평온하게, 아니면 공포에 사로잡힌 채 불안과 고통에 떨고 절규하면서 죽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하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제각각이다. 후회, 아쉬움, 두려움, 체념, 달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감정이 스미고 뒤섞인 반응이 나온다. 죽음에 이르지 않고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체념.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한 것이었군(All my possessions for a moment of time.).”(엘리자베스 1세 1533~1603) 신앙.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난 내 의무를 다 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호레이쇼 넬슨 1758~1805) “안녕! 여러분. 저는 영광을 향해 갑니다!(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이사도라 덩컨 1877~1927) 달관. “나는 죽는다(Ich sterbe.).”(레온하르트 오일러 1707~1783) “사람들에게 말해. 나는 아주 멋진 인생을 보냈다고(Tell them I've had a wonderful life.).”(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 “(와인 한 잔을 마시며) 그쯤이면 됐어(Es ist gut.).”(임마누엘 칸트 1724~1804) “꺼져! 마지막 말은 살아있을 때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나 하는 거야(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마르크스 1818~1883) “어쩔 수 없군(是非に及ばず.).”(오다 노부나가 1534~1582)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네(吾事畢矣).”(문천상 1236~1282) 아쉬움. “좀 더 빛을!(Mehr Licht!).”(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신이여, 내 영혼을 거두되, 투쟁은 계속할 수 있게 하소서(Lord take my soul, but the struggle continues.).”(켄 사로-위와 1941~1995)(위키트리, 2016.4.11. 편집).


네덜란드 의사 베르트 케이제르는 그의 저서 『죽음과 함께 춤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처럼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다는 것을 안 사람은 없다. 우리가 죽는 것도 그와 닮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문턱을 넘기 위해 죽음과 격렬하게 투쟁하며 죽는 사람도 매우 드물다고 말한다. “죽음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불편을 주는 이불 주름이나 복도에서 새나오는 성가신 불빛과 씨름하다가 죽는다. 사람은 죽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죽어갈 수 있다.” 우리의 의식이 죽음의 순간에 도달하기에 앞서 죽음의 문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죽음의 순간을 외면해서일까? 아니면 죽는 순간에 앞서 의식이 미리 닫히는 것일까?(일다, 2013.7.4. 이경신 글 편집). 


죽음의 과정은 알아야 준비하고 선택할 수 있다. 정신과 교수이자 『죽음과 죽어가는 것에 관하여』(New York, 1969)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가 2,000명 이상의 불치병 환자를 관찰한 조사에 따르면 죽음의 단계는 여러 단계이다. 물론 개인마다 매우 상이하고 늘 동일한 순서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제1단계인 부정의 단계로 몇 분에서 몇 달까지 지속될 수 있다. 제2단계인 분노의 단계이다. 분노와 짜증, 원망과 질투가 따르는데, 분노의 대상은 종종 간병인 또는 가족이다. 자신의 화를 누르고 주변사람들을 받아들이면 제3단계인 협상의 단계로서 전위과정이 이루어진다. 연명치료 이후에 가망 없음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상태가 찾아오는 데, 이것이 제4단계인 우울의 단계이다. 끝으로 제5단계인 수용의 단계는 스스로 또는 타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이때에는 최종적인 인내심, 인정과 체념, 모든 관계와 단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이는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시이다(일다, 2013.7.4. 이경신 글 편집).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죽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병에 걸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죽어가는 사람일수록 갑작스러운 죽음을 더 갈망한다고 한다. 갑자기 죽기를 바라는 것은 육체적 고통, 정서적 고통, 심리적 고통이 무섭기 때문이다. 또한 죽어가는 사람은 자존심과 품위를 지킬 수 없다는 고통도 기다린다. 숨 쉬고 먹는 것조차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면, 죽어가는 환자의 남은 삶은 아무리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의학의 연구대상으로 전락해 더는 사람 취급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그 분노는 더할 것이다. 죽음을 선고받은 당사자는 그 순간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더 외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죽는 순간도 홀로 맞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가는 과정도 외로운 여정이긴 마찬가지다. 늘 죽음을 직면하고 자각하는 사람만이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고독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비록 죽어가는 동안 겪게 될 고독이 두렵지만, 인간은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외로움을 피하길 바라지도 죽음의 공포 속에서 맞는 고독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을 불시에 훌쩍 떠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일다, 2013.7.4. 이경신 글 편집).


죽음이 예고된 시한부 삶은 주위에서 흔하게 본다.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하고는 말할 수 없는 세계이다. 세계적인 뇌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올리버 색스 미국 뉴욕대 교수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죽음을 앞둔 심경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출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이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한평생을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한 특혜이자 모험이었다고 느껴집니다. 남은 삶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평소 흠모하던 철학자 흄처럼 인생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있다.…마지막 날을 앞두고 보니 지나온 인생의 조각조각을 큰 틀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글을 쓰고, 새로운 차원의 통찰력을 기를 것이다. 남은 시간 자신과 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인생에서 꼭 필요한 일만 하겠다. 지금 감사하다는 마음이 가장 크다. 그간 지인들과 주고받은 교감, 글쓰기, 세계와의 소통 등에 특히 감사한다.”(동아일보, 2015.2.23. 편집).


암에 걸린 사람은 정말 어렵다. 우리나라 말기 암 환자 가운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58%에 불과하다고 한다. 죽음에 임박한 환자 10명 중 4∼5명은 자신에게 삶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죽는다. 말기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이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병원을 전전하며 가망 없는 연명치료에 매달리거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도 없이 극심한 통증 속에서 숨을 거둔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죽음의 강을 건너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말기 환자들을 상대로 조사해 보면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다는 응답자가 40∼50%에 이른다. 그러나 2012년 조사에 따르면 집에서 죽는 사람은 18.8%이다. 70.1%는 병원에서 죽는다. 말기의 풍경이 비참하다 보니 죽음은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아름다운 부부도 있다. 부인이 대장암 말기였는데, 남편이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남편은 누구의 도움도 원치 않았고 스스로 그 일을 하려고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병동에서 마지막 시간을 같이 보낸 부부이다. 집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말기 환자가 있는 집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족들 관계가 화목하고, 말기였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가족의 일원으로 살다가 떠났다. 1989년에는 집에서 임종하는 경우가 77.4%였다.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고통스럽지 않고, 품위 있게 죽는 방법은 무엇일까? 호스피스 시설의 확대와 국가의 역할을 해법이다. 아파트 중심의 주거문화 속에서 현실적으로 적절한 임종의 장소는 집 근처 호스피스 시설이다. 콘도처럼 편안하고, 가족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고, 의료진이 항상 대기하는 환경이라면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로서 적당하지 않을까? 호스피스는 죽음의 질을 높이는 데 핵심적인 시설이다. 고통을 조절하는 치료가 가능하고 가족들의 곁에서 품위를 지키며 임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호스피스 병상 수는 880개로 필요 병상(2500개)의 35.2% 수준이다(국민일보, 2014.8.7. 편집).


죽음은 인간만의 일이 아니다. 동물도 식물도 죽음을 겪는다. 실험용 쥐 아홉 마리 뇌파를 분석한 결과 모두 죽으면서 평소보다 강력한 뇌파를 발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간도 그렇다.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많은 사람들이 종종 ‘지나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Life flashed before my eyes.).’라고 말한다.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단순이 환각만은 아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 뇌에서 강력한 전기 신호가 나온다. 연명치료를 포기한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면 뇌파(감마파)가 치솟은 뒤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마파는 복잡한 정신활동을 할 때 나온다. 뇌파는 뇌에서 기억을 출력하는 곳에서 나왔다. 하지만 네 사람만 분석한 자료이고 뇌파가 주마등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고 이들이 죽는 순간 주마등을 겪었는지도 확인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다. 뇌파가 치솟는 건 단순히 산소 부족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죽으면서 몸에 산소가 부족해지면 몸 전체로 퍼져야 할 에너지가 뇌에만 쏠리면서 뇌파가 치솟는다는 주장이다.

https://www.pnas.org/doi/10.1073/pnas.2216268120


인간은 극도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과거의 기억을 회상한다고 한다. 인간의 뇌가 위급한 순간에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장된 모든 경험을 꺼내 찾는 것이다.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에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속도로 과거 기억을 돌아보고, 그렇게 해서 좋은 방안이 떠오른 인류만 운 좋게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의 순간, 주마등처럼 과거를 뒤적거리는 인류의 뇌는 생존에 유리한 방법을 찾도록 진화한 것인지도 모른다. 


87세 남자가 뇌출혈이 발생해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고 이내 사망했다. 도착하자마자 뇌파 검사를 진행해 심장박동을 멈추기 전과 후 30초 동안 일어난 뇌 활동을 기록했다. 주로 관측된 뇌파는 과거를 회상하거나 고차원적 인지 정보를 처리할 때 나타나는 감마 파였다. 죽음에 이르기 전 뇌가 과거를 회상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 정말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지, 아니면 후회 없는 삶을 돌아보기 위한 찰나의 여운인지는 아직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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