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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 년간 지속된 흑사병의 ‘흑’ 역사(끝)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무덤의 유골 치아에서 DNA를 추출해 분석했더니 그 DNA는 10년 뒤 유럽을 휩쓴 페스트균들이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전의 형태와 일치했다. 그곳이 흑사병의 빅뱅이 일어난 장소였던 것이다. 무덤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오늘날 이식 쿨 호수 근처에 사는 설치류의 페스트균과도 유사하여 설치류의 페스트균이 사람에게 옮겨오면서 흑사병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상이변으로 텐샨 산맥의 마멋이 폭증하면서 실크로드를 오가던 무역상들에게 페스트균을 옮겼을 가능성이 크다. 텐산 산맥은 남으로는 키르기스스탄, 북으로는 카자흐스탄, 동으로는 중국과 접해있다. 키르기스스탄 무덤은 무역상들이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던 실크로드에 가까운 곳에 있다. 실제로 키르기스스탄 무덤에서는 인도양에서 나온 진주나 지중해의 석탄, 여러 나라의 동전 등이 출토됐다. 페스트균은 무역상을 통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 도시로 갔고, 그곳 쥐들에 퍼지면서 흑사병이 창궐한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346~1353년 7년 동안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 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 당시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성안으로 던졌다고 한다. 생물학 무기를 쓴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흑사병이 아시아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했다. 과학자들도 DNA 연구를 통해 같은 주장을 폈다.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들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돌연변이가 많이 생긴 상태였다는 점에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추정됐다. 진원지는 중앙아시아로 지목됐다. 그곳에 있는 설치류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유럽 페스트균의 시조로 추정되는 종류와 유전자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중세 초기에 시작된 흑사병은 유럽 지역에서 1346년~1353년 사이 절정에 달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시작되어 비단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해 1343년경 우크라이나 흑해의 크림 반도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화물선에 있던 쥐에 기생하는 쥐벼룩을 통해 지중해 해운 망을 따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몽골의 킵차크한국은 1345년 동유럽 정벌에 나서서 크림반도의 카파를 공격했다. 하지만 1년 동안 성은 끄떡없었고 몽고군에서 흑사병이 돌았다. 몽고군은 투석기로 죽은 시체를 성 안으로 던졌다. 성 안에 페스트가 퍼져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몽고군도 페스트를 견디지 못해 철수했다. 성에서 살아남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1347년 시칠리아로 돌아가면서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번졌다. 그 후 5년간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페스트로 사망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흑사병 이전의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4세기를 거치며 3억 5천만 명~3억 7500만 명 정도로 거의 1억 명 이상이 줄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줄어든 세계 인구가 흑사병 이전 수준까지 회복되는 데는 17세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14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흑사병은 18세기 중반까지 수시로 곳곳에서 유행했다. 1665년 4월부터는 영국에 흑사병이 다시 퍼졌다. 흑사병은 1년 동안에 런던에서만 총인구의 15%인 100,000명을 죽였다. 프랑스 남쪽 지중해변의 항구도시 마르세이유의 대 역병(Great Plague of Marseille)은 1720~1723년에 발생했다. 프랑스의 상선 하나가 지중해 동쪽에서 마르세이유 항에 정박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페스트 때문에 외지에서 온 배는 입항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 상선은 들어왔다. 이때부터 빠르게 전파된 페스트는 마르세이유와 인근 지역 주민의 3분의 1에 가까운 100,000명을 희생시켰다. 1770~1772년 모스크바에서도 페스트가 유행하여 약 100,000명의 사람이 죽었다.


의학이 무용지물이었던 당시 사람들은 오로지 신앙과 기도에 희망을 걸었다.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만이 가장 고귀한 의사라고 전파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동과 함께 페스트도 함께 움직였다. 당시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영하던 예식에서 신자들은 거룩한 성체를 감히 손으로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입을 벌려 사제의 손에는 사람들의 타액이 묻어 다른 이들의 입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질병의 원인을 묻는 행위조차 죄악에 해당하며 의사들의 약 처방, 수술 등과 같은 치료 행위도 신의 영역을 간섭하는 것이므로 죄악이라고 여겨지던 시대였다. 다만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에서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측면을 간과할 수는 없다. 


유대인에게는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다. 정결 예식에 따라 자주 손과 발을 씻어 예방을 할 수 있었다. 전염병이나 나병 환자는 가족이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동체 밖으로 격리시킴으로써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을 시작으로 ‘유대인이 샘이나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대인 대학살을 불러왔다.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을 생매장하거나 화형 시켰다. 유대인 학살이 너무 확대되자 당시 교황 클레멘스 6세는 1348년 9월 26일 이러한 소문을 일축하는 칙서를 내리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을 멈추게 했다. 


인류는 감염병과 함께 진화했다. 중세 유럽 흑사병이 인간의 면역 체계를 바꾸어놓았다. 당시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면역 관련 유전자 중 약 70%가 변이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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