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이 죽자 정원에 무덤을 만들어서 매장했다. 죽은 반려견과 친구 같이 살던 반려견은 무덤 옆에 누워 슬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는 무덤 곁에 한동안 머물렀다. 2022년 뉴스이다. 정말로 슬픔을 느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려견도 죽음을 아는 것일 수 있다. 죽음은 생명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의식’이 있는 생명이라면 죽음에 모두 혼란스럽다. 그리고 타자의 죽음에 슬픔을 느낀다.
모든 연구조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종교의 흔적을 간직하지 않은 민족이나 부족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 뿐이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세계에서는 자연은 신비였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우주는 신화라는 방식을 통해 설명되었다. 신화에서는 자연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본질적으로 초자연적 존재 또는 신을 필요로 하였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찾아온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중요한 원천은 종교인 셈이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인간이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왔다. 그런데 인간이라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제공한 종교의 기원은 무엇일까.
종교의 기원에 수많은 설명이 있지만 아마도 생명이 직면하는 ‘죽음’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으로 보인다. ‘타자’ 또는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기원한 것에 종교의 기원이 있다는 생각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필립 리버만(Philip Lieberman)은『Uniquely Human』(1993)에서 종교적인 관념과 종교적인 행위의 가장 초기의 것은 의식적인 매장이라고 보았다. 매장은 죽음에 대한 의식과 내세에 대한 관념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부장품을 함께 매장하는 것은 뚜렷하게 종교적 의미와 사후에 대한 관념을 의미한다.
종교는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2백여만 년 전 인류의 직계 조상이 아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도 시신을 묻는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유인원도 종교라는 관념이 희미하게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201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인근 ‘떠오르는 별(Rising Star)’이라는 이름의 동굴 깊숙한 곳에서 호모 날레디의 화석을 발견했다. 날레디는 현지 언어로 ‘빛’라는 뜻이다. 2015년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리 버거(Lee Rogers Berger) 교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새로운 종(호모 날레디)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호모 날레디(Homo naledi)는 24만~34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발굴된 동굴에서 최소 15명의 시신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의도적으로 놓아둔 것으로 보여 죽은 자를 땅에 묻는 장례와 같은 의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들이 인간의 직접 조상은 아니지만 시신을 묻는 의식을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놀랍다. 진화의 과정에서 이 시기쯤엔 생물계에서 죽음과 종교라는 관념이 희미하게 싹트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만의 일은 아니었나보다. 그러나 호모 날레디가 의도적으로 매장했는지 불분명하였다. 당초 호모 날레디가 동굴에 시신들을 가져와 안치했지만, 매장까지 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2018년 발견한 호모 날레디를 연구한 결과 의도적으로 파낸 구덩이에 시신을 묻고 흙으로 덮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아프리카에서 알려진 최초의 인간 매장보다 최소 16만 년 이상 앞선 것이 된다. 호모 날레디(Homo naledi)로 알려진 멸종된 인류가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나 사촌 격인 네안데르탈인보다 최소 16만 년 전에 지하 동굴 두 곳에 시신을 의도적으로 묻었으며, 무덤 입구에 기하학 표식도 남겼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호모 날레디가 시신을 매장하고 기호로 무덤을 장식했다는 주장은 아직 검증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매장보다 시신을 한 데 모아 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증거와 분석이 필요하다.
202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동굴의 좁은 틈새에서 유아 두개골을 발견했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곳에서 유골이 나와 의도적으로 시신을 매장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호모 날레디는 키가 144㎝ 정도로 추정돼 동굴에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를 비롯한 아주 오래 전 초창기 인류에서 무덤의 부장품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옛날부터 초기 인류가 적어도 죽음 이후의 세계인 내세의 가능성을 믿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꿔 말하면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붓다는 “태어남이 있으니 죽음이 있다.”는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말을 했다. 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최초 조상이 죄를 지어 인간이 죽는다고 보았다. 그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를 몰랐으니 그 역사적 오류를 사람들은 잊었다. 물리학적으로 죽음은 ‘열역학 제3법칙’의 귀결이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의 원인은 다양하다. 수십억 년 전 생명이 탄생한 이래 죽지 않은 존재는 없다. 존재했던 종도 95% 이상 멸종했다. 태어난 생명도 상당수가 다른 생명의 먹이로 죽는다. 자연수명을 다한 존재는 그나마 다행이다. 인간의 자연수명은 40년도 안 된다. 인간이 오랜 세월 과학과 의학을 발달시킨 덕에 이제 평균수명은 80대까지 올랐다.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생명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모든 생명의 죽음은 산 자에게 슬픔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기르던 반려견 ‘마루’가 죽자 화장해 집 마당 나무 사이에 수목장으로 묻었다. 마루는 풍산개로 2017년 대통령 취임 전부터 경남 양산 사저에서 기른 반려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