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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만 년 전의 동남아시아 여행


마지막 빙하기와 그 이후의 빙하의 퇴각은 동남아시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이 농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홍적세(Pleistocene, 약 259만 년 전~1만 년 전)에 동남아시아의 환경은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초기 홍적세 때의 열대우림이 중기 홍적세 때 사바나 초원으로 바뀌고 말기 홍적세 때 다시 열대우림으로 뒤덮였다. 홍적세 초기에 열대우림이 번성했으나, 점차 초지가 더 많은 환경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약 100만 년 전에 정점에 이르렀다. 사바나 초원으로 바뀐 시기 동남아시아는 지금은 멸종된 스테고돈(코끼리와 유사), 하이에나, 아시아코뿔소와 물소 등 거대 동물들이 번성했다. 거대 초식 동물이 살고 고대 인류가 번성했다. 약 10만 년 전 열대우림이 다시 우거지기 시작하면서 거대 동물이 멸종하고 이 지역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 같은 고인류도 사라졌다. 열대우림 환경에 적응한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인간은 동남아시아의 포유류들에게 가장 큰 위협이다. 도시 확장과 삼림 벌채 및 과도한 사냥 등을 통해 광대한 열대우림을 황폐화시킴으로써 살아남은 몇몇 거대 동물은 위험에 처해있다. 동남아시아가 지금은 열대우림이지만 수십만 년 동안 사바나 초원이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동남아시아에 살고 있는 인간은 언제 아프리카에서 이주했을까?


당시 동남아시아 남부에는 순다랜드(Sundaland)가 있었다. 빙하기 때 동남아시아 말레이 반도부터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자바 섬, 보르네오 섬을 잇는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작은 대륙이었다. 빙하기에는 현대보다 해수면이 100m 아래에 위치해 지금은 얕은 바다가 되었다.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약 6~7만 년 전 지금의 인도네시아인 순다랜드에 도착했다. 당시 해수면이 낮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과 동남아시아는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현생 인류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6만3000년~7만3000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북부의 토바 화산은 약 7만 1600년 전에 폭발로 인류가 위기를 겪었는데 화산 폭발 이전에 여기에 온 인류가 이로 인해 멸종하고 폭발 이후 다시 이주해 온 인류가 동쪽으로 이주를 이어갔을 수도 있고 폭발의 혹독함을 견뎌냈을 가능성도 있다.


2023년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 동남아시아를 통해 호주로 이동한 시기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4만년 정도 더 이르다는 연구가 나왔다. 최고 8만 6천 년 전~6만 8천 년 전 화석이 라오스 북부 동굴에서 발견됐다. 지금까지 동남아시아 대륙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 증거이다. 화석 분석 결과 이들이 현지에 분포돼 살고 있던 고인류 집단으로부터 진화했거나 현생인류와 고인류 집단의 혼합 혈통이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이곳으로 이주해온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혈통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지금까지 초기 호모 사피엔스 흔적이 해안선이나 섬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화석이 발견된 동굴은 바다에서 최소 300㎞ 이상 떨어져 있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이주 시 내륙의 숲 지역도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동남아시아 대륙에 도착한 시기도 알려진 것보다 4만년 정도 더 빠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동굴은 약 7만 년 전에 데니소바인이 많이 거주했던 코브라 동굴과 매우 가까이 있다. 이 지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 조상 인류가 사용했던 이동 경로일 수 있다. 

https://www.nature.com/articles/s41467-023-38715-y


기원전 5000년 경 인도네시아 술라웨시(Sulawesi) 섬에서 죽은 10대 여성의 뼈가 발견되었다. DNA 분석 결과 5만 년 전 월리시아에 온 최초 현생인류의 후손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호주와 뉴기니를 합친 빙하기 육지 덩어리인 ‘그레이터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정착한 인류의 일부로, 오늘날 호주 원주민과 파푸아인의 조상이다. 이 여성의 DNA에는 또 아시아에서 유래하는 다른 계통의 조상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이 화석의 DNA에는 데니소바인의 흔적도 남아있다. 그동안 데니소바인의 화석은 주로 시베리아와 티베트에서 출토돼 왔다. 술라웨시 섬의 여성에게서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발견된 사례는 데니소바인이 지금까지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월리시아 서부에 살고 있던 다른 수렵인의 DNA를 보면 데니소바인의 흔적은 없다. 월리시아의 현생인류와 데니소바인의 지리적 분포가 겹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곳은 데니소바인과 호주 원주민 그리고 파푸아인이 교류한 중요한 장소일 가능성도 있다. 이후 동남아시아에는 인간이 띄엄띄엄 흩어져 살았고 기원전 약 23000년에는 그 자손이 베이징 부근에 온 증거가 남아있다.


인간은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다. 사막과 고지대, 열대우림 등 극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히말라야, 특히 파키스탄 쪽 히말라야는 나무도 풀도 거의 없는 불모지대이다. 그곳으로 트레킹을 가보면 멀리 4천 미터 이상의 황무지 능선을 따라 길이 가늘게 이어지고 아주 띄엄띄엄 집이 보인다. 무엇을 하며 무엇을 먹고 사는지 궁금하다. 이런 환경 적응력으로 사람 속 중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티모르 섬이 있는 월리시아(Wallacea) 일대의 섬들은 호주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를 깊은 바닷물로 갈라놓은 섬이다. 월리시아의 섬들은 플라이토세 후기에 동남아시아의 대륙과 연결된 적이 없어 바닷물을 건너야 닿을 수 있다. 섬 안쪽의 열대림은 포유류가 사는 사바나와는 많이 달라 오지였다. 극한 오지였지만 이곳에서도 인간의 조상들이 살았다. 월리시아 내 섬에는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화석이 나오는 등 적어도 100만 년 전에 사람속이 출현한 고고학적 증거가 발굴되었다. 현생인류는 약 4만~5만 년 전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간은 호주 대륙으로 이동해가다가 월리스 일대 섬의 해안가에 잠깐 머물렀을 것이라는 것이 기존의 추정이었다. 그러나 초기 현생인류 조상은 해산물을 먹고 살면서 정착했다는 증거가 나왔다. 2만 년 전에는 내륙으로 이동한 증거도 나왔다.


그 후 2만 년 이상이 지나고 동남아시아는 한국 관광객으로 넘쳐난다. 그저 흥청망청 몰려다니고, 몰려가는 관광으로는 동남아시아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이곳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과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수만 년 전 이곳으로 이주한 인류의 이주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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