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삶과 죽음의 공존,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

2022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2023년까지 수십만 명이 죽었다. 전쟁으로 가족이나 지인이 죽으면 산 자에게 고통이다. 대부분 장례식도 치루지 못한다. 살아남은 사람에게 죽음의 기억은 평생 따라다닌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이 겪는 일이다. 사는 것이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타자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매우 생물학적이고 진화적이다. 가까운 가족의 죽음은 엄청난 슬픔이고 고통이고 상실감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는 그렇지 않다. 가족의 죽음에 모든 인간은 장례식을 치른다. 화장을 하거나 매장을 한다. 애도를 표하고 오랜 기간 상실감으로 힘들어한다.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초파리 같은 미물도 자신의 죽은 동료 사이에서 살면 노화가 빨라지고 수명이 30%나 단축된다. 죽은 동료를 보면 마치 그것을 인식하는 듯이 뇌의 뉴런이 반응한다. 죽은 시체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고 수명이 단축된다. 인간도 가까운 가족이 죽으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상실감으로 고통을 받는다. 수명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https://journals.plos.org/plosbiology/article?id=10.1371/journal.pbio.3002149


코끼리는 동료가 죽으면 주위에 둘러서서 코로 쓰다듬는다. 흙과 나뭇잎으로 덮어주기도 한다. 원숭이나 돌고래는 죽은 새끼를 계속 들고 다닌다. 원숭이가 죽은 새끼를 몇 달씩 품고 다니는 것은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는 슬픈 행위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처럼 상실감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경우 사산한 아기를 안아보기만 해도 우울증이 줄어든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에게 죽음은 위험이다. 과학자들은 동물들이 동료의 죽음에 대응하는 행동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화했다고 본다. 동물은 동료의 죽음 앞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장례를 치르는 것 같아 보이는 행동도, 내다 버리는 것도 생존을 위한 행동이다. 동물의 사체는 전염병의 원인이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또 동료를 죽인 누군가에 대한 경계심도 강화한다. 까마귀는 자신의 동료를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위험 요인으로 기억한다. 꿀벌은 동료가 죽으면 즉시 집 밖에 내다 버려 ‘위험 요인’을 제거한다.


인간에게 장례식은 복합적인 감정과 사회심리적인 배경이 작용한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장례식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죽음으로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들의 애도를 위해 장례식이 존재해왔다는 점을 주목할 때, 장례식이 살아남은 사람을 위한 의식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분출해 슬픔을 견뎌낼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자신의 삶을 지속시켜낼 힘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우리는 그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한다. 죽은 사람은 죽은 자의 세계로 떠나보내고, 산 사람은 산 자의 세상에 남는다. 유대인의 장례 전통은 진정한 애도를 위한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어가는 사람 곁에 머무르고 임종을 지키고 장례식을 준비하고 진행하면서 한 사람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도록 한다. 장례식의 준비와 실행 과정에서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제대로 슬픔을 소화해서 죽은 사람 없이도 자기 삶을 잘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관을 매장할 때 직접 삽질을 하도록 함으로써 죽음을 직시하고 슬픔을 밖으로 표출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1년의 애도 기간을 두는 유대교의 현명함이 놀랍다. 누구나 죽음을 단번에 받아들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죽음을 완전히 수용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슬픔의 다양한 단계를 인정해, 3일간의 깊은 슬픔, 7일간의 애도, 30일간의 점차적인 재적응, 11개월 동안의 추모와 치유 과정으로 애도 기간을 나눈다고 한다. 장례식은 살아남은 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삶을 이어가기 위해 애도를 시작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 맞는 것 같다(일다, 2013.12.27. 이경신).

매거진의 이전글 논란의 인간복제 어디까지 왔을까 ‘대체’ 왜 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