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목사생활
지난 일요일 아침,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Emergency Alert/Alerte D'urgence] A Dangerous Persons Alert is being issued by the Melfort RCMP after several calls of stabbings on the James Smith Cree Nation. ... "
2022년 9월 4일, 서스캐처원 주 전역에 뿌려진 긴급경보문자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어린이가 실종되었을 경우에 뜨는 앰버 얼럿(Amber Alert)는 간혹 받아봤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멜포트 RCMP(왕립캐나다기마경찰)가 발표했다는데, 멜포트는 내가 사는 마을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웃동네였다.
이후로 긴급경보문자는 여러 번 업데이트되었다. 3번째 경고문자를 받았을 때, 주일 예배를 시작하기 30분 전이었다.
데이미언(Damien)과 마일즈(Miles) 샌더슨 형제가 제임스 스미스 선주민 구역과 인근 마을인 웰돈(Weldon)에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칼로 찔렀고 무려 10명이 죽고 18명이 다쳐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했다. 두 형제가 검은 닛산을 타고 도주하고 있으니 수상한 사람을 조심하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
교우회장은 11시에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교회문을 잠그겠다고 했다. 강대상에 오르니,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는 회중석이 보였다. 만약 긴급경보문자의 그 두 형제가 칼을 들고 예배당에 들어온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총이라면 무조건 몸을 사리고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칼이라면 어떨까? 급히 숨어야 할까, 달려가 막아서야 할까?
순간, 아내와 아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거지? 액션영화 주인공처럼 칼을 든 두 사람을 제압할 수 없을 것이고, 그저 대신 칼에 찔리고 도망칠 시간을 조금 벌어주는 정도가 최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교인들을 위해 나는 죽음을 무릅쓸 수 있을까? 아니면 교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목숨이라도 구하기 위해 그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가슴이 무겁고 숨이 막혔다. 그런 상황에서 교인들을 위해 선뜻 나서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강대상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갑자기 그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그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 내 몸의 반응은 정직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결정적 순간에는 내 마음대로도 아니고, 내 생각대로도 아니고, 그저 살아왔던 온몸으로 그렇게 반응하게 될 것이다.
샌더슨 형제 중에 동생 데이미언은 9월 6일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형 마일즈는 9월 7일에 체포되어 병원에서 사망했다.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에 찌든 선주민 형제가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결코 이런 문장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사스캐처원 주에서 일어났던 '콜튼 부쉬' 사건과 연계되어 "위험한 선주민"이라는 백인주의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보인다.(지난 2016년에, 선주민 청년들이 차가 고장 나서 백인 농장에 들어갔다가, 백인 농장주 제랄드 스탠리(Gerald Stanley)가 쏜 총에 선주민 청년 콜튼 부쉬(Colten Boushie)가 살해당했다. 하지만 백인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들은 백인농장주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데이미언과 마일즈, 두 선주민 형제는 어려서부터 가정폭력과 학대, 유기를 경험했다. 특히 마일즈는 무려 59번의 크고작은 죄목의 유죄 경력이 있고 11살 때부터 코카인을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선주민들 중에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의 비율이 높고, 청소년들이 감옥에 수감된 비율이 다른 인종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선주민들을 '문제적이고 위험한 타자'로 삼는 데 이용되는 팩트 중 하나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가?
한 마디로 백인우월주의 사회가 저질러온 억압과 착취의 결과다.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들어오기 전에 선주민들에게 알코올 중독은 흔하지 않았다. 백인 식민주의자들, 그리고 주류 백인 교회들이 강제로 운영했던 원주민기숙학교가 세대 절 단절, 문화적 학살(실제 학살과 학대)을 자행하기 전에, 선주민 가정과 공동체는 건강했다.
이들이 저지른 죄는 무겁다. 하지만 캐나다 선주민들이 대를 거쳐 겪어온 식민주의, 백인주의의 억압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무겁다. 이 사건은 두 연쇄살인범이 저지른 '죄의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는 세대를 거쳐 누적된 '한의 문제'다.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에게 붙이는 딱지인 경우가 많지 않은가? 이같은 사회학적 분석 없이 종교적으로 죄를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실제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한의 문제인 것이다. 죄의 문제가 아니라 죄를 범하게 되는 여러 가지 사회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아니라, 횡포의 문제다. 이러한 한의 문제는 실질적이며 긴박한 문제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312쪽)
온갖 아는 척, 온갖 잘난 척 하던 백인(남성)들의 신학은 이 지점에서 별 말이 없다. 한국땅에서 백인들의 "앞선" 신학을 수용하는 이들은, 백인들이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백인들의 신학을 가지고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특히 무엇을 보고도 못 깨닫고 있는지, 무엇에 입을 닫고 있는지를 똑똑히 보면서, 그들의 신학을 변용할 필요가 있다. 그저 백인주의의 현 상태를 직간접적으로 유지하고 옹호하는 신학을 그대로 가지고서 한국사회의 문제를 결코 풀 수 없다는 사실이, 한국사회 바깥에 서있는 나에게는 너무도 명백하게 보인다. 오히려 민중신학의 이야기가 캐나다 선주민들의 이야기와 합류할 가능성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