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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은 Dec 19. 2022

캐나다 대평원에서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다양한 언어들로 빚어내는 멋진 불협화음 


"영어를 못 하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줄래?" 

(Would you like to go back to your country if you don't speak English?) 


5년 반 전에 캐나다에 도착한 지 며칠 후에, 경치 좋기로 소문난(백인들이 은퇴하고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동네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Niagara-on-the-lake)라는 곳에 놀러갔을 때였다. 길가의 어느 레스토랑 앞에서 메뉴판을 보면서 아내와 (당연히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느 백인 여성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사뭇 친절한 말투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접수가 되지 않았다. 어, 그러니까, 영어를 못하면... 근데, 이거 지금 인종차별 그런 건가? 


아시아 관광객에게 영어로 할 줄 모르면 여기서 꺼지라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조근조근한 말투로 상냥하게 건네는 곳. 캐나다가 1970년대에 도입했던 '다문화주의'는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의미와 달리, 애초에 사실상 '백인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공용어를 영어와 프랑스어로 삼은 것은, 이 두 언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들(비-백인)을 체계적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그 다문화주의는 세월이 지나 어느 덧 의미가 변용되어 캐나다를 상징하는 가치처럼 되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에서 겪은 작은 개인적 에피소드는 캐나다가 '다문화주의'도 내세우면서도 어떻게 여전히 백인중심적인 사회를 고수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다. 


이주를 선택하면서 '언어'와 '권력'의 관계를 더 적나라하게 피부로 느끼게 된다. 원어민의 완벽한(?) 영어 앞에서 경험하는 '쪽팔림,' '낯뜨거움'은 내 몸에서 사회의 위계가 작동하는 증거다. 내가 말할 때마다 내 언어는 부서지고 망가져 있다(broken English).   


원어민중심주의는 내 몸과 마음 너무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이를 인식하거나 저항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이주 생활을 하면서 매일 조금씩 영어를 망가뜨리게 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없는 것을 긍정하는 법을 매일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사건에서는 성령의 임재로 창세기 바벨탑 설화의 단일한 언어와 체계가 지닌 폭력성은 전복된다. 성령의 임재는 언어들 사이에서 언어를 넘어서는 사건이다.  


티즈데일이라는 시골마을은 인구 3,000명의 아주 작은 마을이다. 백인이 여전히 주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와 이주의 영향으로 이 시골마을에서도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간다. 특히, 시리아 난민, 우크라이나 난민을 비롯해서 필리핀, 중국, 홍콩, 인도, 파키스탄 출신이 많다. 또 이 마을의 유일한 병원에는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란 백인 의사는 단 한 명도 없다. 의사들은 모두 남아프리카공화국, 나이지리아, 이집트, 이란 등에서 왔다. 그 무수한 다양성이 백인중심적 사회로 '동화'되는 선에서 허용/수용된다.    


캐나다 시골마을 구석에서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이 지닌 독특하고 고유하고 시끄럽고 이질적인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노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세계이주민의 날(International Migrants Day)에, 영어를 못하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던 나이아가라온더레이크에서, 캐나다대평원의 작은 마을 티즈데일까지의 사적인 이주의 여정을 기억한다. 이 다양한 언어들이 빚어내는 불협화음(cacophony)의 캐롤은, 언어를 망가뜨리는 무/능력을 창조적 자원으로 삼고자 고투하는 이주자로서 제출한 응답이다.

https://youtu.be/-fwSD2evZ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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